외교관도 장관도 예외는 없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치안이 좋은 싱가포르가 어떤 이에게는 재미없는, 그저 습도 높은 동남아 국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지내면서 아쉬운 점이 있고 불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가 나에게는 살기 좋은 나라인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조건들 중 상당수를 충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각자가 생각하는 '살기 좋은 나라'는 각양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정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며, 법을 지키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 A를 하면 B라는 대가를 치른다는 공식이 누구에게나 성립되는 곳. 그 주체가 어느 대기업 총수라도, 어느 정당의 대표인지는 상관없다. 법이란 그래야 하는 거니까.
싱가포르는 아직도 태형을 실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대상은 외국인, 심지어 외교관이라도 적용된다. 2017년 휴가로 싱가포르를 찾은 사우디 대사관 직원 반 데르 야히야 알자흐라니는 호텔 방에서 여성 인턴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징역 26개월 1주일과 4대의 태형을 선고받았다.
싱가포르의 법을 어기고, 질서를 흐렸다면 그 대가는 누가 되었든 똑같이 적용된다. 예외는 없다.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 기구(TI)가 발표하는 '국가 청렴도' 순위에서 싱가포르는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는데 2019년에도 스웨덴, 스위스와 함께 공동 3위를 차지했다. 아시아에서는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한국은 180국 가운데 39위를 차지했다.
싱가포르가 외국인과 기업이 신뢰하는 무역허브가 되기 위해서는 부정부패가 없는 청렴한 국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리콴유 초대 총리는 자신의 측근부터 성역 없이 조사하고 처벌할 것을 지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주 소개되는 이야기는 태치앙완 국가개발부 장관의 이야기다. 태치앙완 장관은 리콴유의 최측근이었다.
1986년 정부가 수용한 토지를 매매하도록 도와주는 과정에서 80만의 달러를 수수한 혐의로 조사국의 수사를 받았다. 장관은 개인 면담을 요청했지만 냉정히 거절했다고 알려진다. 그 후 태치앙완 장관은 결국 자살을 택했다. 총리의 최측근 인물들에게도 같은 법이 적용되었다.
싱가포르 국민에게 있어 법이란 간혹 국제사회에서 너무 가혹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무섭지만 최소한 공정한 것이다. 내가 법을 지키고 사는 것이 바보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편법을 쓰고, 법을 어긴 이들은 언젠가는 처벌받는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한국에서는 타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한탕 크게 한 이들이 그저 몇 년 감옥에서 살다 나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먹고 잘 산다. 정작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은 구제받을 길이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작 열심히 성실하게 법을 지키며 산 이들은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과연 그게 건강한 사회일까.
그래서 나는 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사회, 성실하게 살아도 손해보지 않는 사회인 싱가포르가 좋다.
논점을 흐리는 분들이 있을까 봐 미리 말해둡니다. 이 글의 논점은 "공정한 사회"입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것도, 외국은 짱 우리나라 헬조선이라는 이분법도 아닙니다. (실제로 포털에서는 이런 류의 댓글을 종종 봅니다만) 다만 전 오늘 싱가포르라는 사회의 공정성에 대해 말해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