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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을 최악의 해라고 생각했다.

by 에리카팕

2025년을 최악의 해라고 생각했다. 원치 않는 퇴사를 한 해에 두 번이나 겪었다는 이유로 나는 올해 너무 많이 울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치를 떨고 힘들어했다. ‘세상이 나를 억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 커리어는 이제 망한 것 같아. 결국 살아생전 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는 못되려나 봐. 에디터도 나랑 안 맞아. 박지윤은 망한 것 같아. 에리카팕도 망한 것 같아. 다른 이름을 만들어야 할까?’라고 그 누구도 하지 않은 말을 스스로 되뇌며 한 치 앞을 나아가지 못했다. 혼자 있는 시간만 되면 구덩이를 삽질하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


혼자가 되면 아무도 안 시킨 삽질을 틈틈이 하기 때문에 일부러 달력에 약속을 바글바글 잡고 집에서 또 집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먹고 떠들고 즐거워하고 위로받았다. 10월~ 11월은 그렇게 밀도 있게 놀고먹었다.


며칠 전 친구들과 함께 땡스 기빙 디너를 함께하며 올해 2025년 감사할 일들을 꼽아보자니 생각보다 너무 많은 감사함이 있는 것이다? 세어보려고 하니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귀한 인연들과 만남의 축복이 끊임이 없었고, 허구한 날들 맛있는 걸 먹어 사진첩만 봐도 배가 불렀다. 그리고 사진첩 속에 나는 너무 잘 까불고 잘 웃었다. 하트도 막 날리고. 게다가 좀 귀엽기까지??(!!!??)


기록과 기억이 전혀 다른 것이다. 돈벌이와 커리어만으로 올해를 평가절하하며 속단하기에 나는 시시때때로 시시콜콜 즐거웠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이가 언제나 함께였고, 사랑하고 있었고, 때때로 뜻밖의 행운이 따르는 일들도 있었고, 바로미터이자 거울처럼 나의 상태를 돌보아주는 친구들도 있었고, 다정한 사람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냈고 흐뭇했고 흡족했다. 사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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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꿈의 제인에서 구교환 배우가 연기한 제인이 말한다.

어쩌다 이렇게 한 번 행복하면 됐죠. 그럼 된 거예요.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나는 촌각을 다투며 무수히 행복했다. 불행한 순간들을 지나더라도 어쩌다 행복했던 기록을 믿고 기억을 설득하자. 너는 행복했노라고. 대체로 행복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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