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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Feb 16. 2020

'남사친'이 주는 어떤 환상

 ‘나에게도 영화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여자는 궁금하기도 했고,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십여년이 넘은 '남사친'이 혹시 그토록 자신이 찾던 상대인지 말이다.


 즉흥적인 것은 아니었다. 몇년간 입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몇번이고 속으로 삼켰던 말이었다. 이제는 임계점을 지나도 한참 지났기에 한번은 짚고 가야하는 시점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피하고 싶지만 더이상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여자가 처음부터 남자가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십수년간 연락을 꾸준히 하면서 세칭 ‘남사친’, '여사친'이 되기에 이르렀다. 평소 사람들과 연락을 하는 것을 즐기는 남자의 성향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한참전에 정리됐을지도 모른다.

 대화를 즐기는 남자는 여자가 회사 생활로 힘들 때 불평을 들어주기도 했고, 때로는 위로를 주기도 했다.  서로 소개팅을 시켜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각자의 일상을 상당 부분 공유할 만큼 둘의 관계는 나름 솔직했다.

 여자가 먼저 남자의 의사를 물어보게 된 것은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끝까지 내몰려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에서는 아니었다. 다만, 사람에 다치고 세상에 지쳐 자신의 진짜 속내를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의 존재가 새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분이 땅으로 가라앉을 때,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생각과 기분이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될 즈음이기도 했다.

 사실 솔직한 성격의 그녀가 남자에게 먼저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때때로 독신주의를 피력해 왔기 때문이다. 처음엔 농반진반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여자의 마음 한구석은 불안해져왔다.

 그녀는 어느 정도 결혼에 대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남사친'에게 기대감 또는 환상이 없지는 않았다. '나중에 혹시 서로 진지한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오는 것처럼 결정적인 계기만 있으면 관계가 발전할지도 모르지', '이렇게 십여년간 꾸준히 서로 연락하고 지냈다는 것 자체가 그린 라이트 아닐까.'

 인정하기 싫지만, 그녀가 그를 일종의 '보험'처럼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만 마음을 먹으면 둘의 관계는 잘 될 수 있다고도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착각일 수도 있는 생각이 점점 그녀에게 독이 되는 것을 느꼈다. 어느 순간 '믿을 구석'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현실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사친'이 주는 심리적 환상과 달콤한 착각에 언제까지 빠져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둘의 관계를 좀더 확실하게 정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 주변에 숱하게 물어봤다. 카톡으로 늘 먼저 안부를 묻는 그에 대해, 야근을 하면 차로 데리러 오는 그에 대해, 해외 여행을 마치면 가끔 공항으로 데리러 오는 그에 대해 말이다.

 주변에 '남사친' '여사친'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혹자는 "남자는 자기가 관심 없는 여자에 대해 전혀 시간과 돈을 쓰지 않는다. 남녀 사이에 친구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고, 또다른 이는 "십년 넘게 관계가 진전이 되기 않는다면, 그 관계는 끝난 것인데 굳이 확인하려 드냐"고도 충고했다.

 하지만 그녀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지만, 이제 자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메스를 들어야할 때가 온 것이었다. 더이상 '남사친'이 주는 안정감을 버리고 현실을 마주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D-day가 된 날, 평소 하지 않던 화장까지 하고 나간 그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가 좋은 친구 한명을 잃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에 입이 마르고, 물을 몇번째나 들이켰는지 모른다. 쓸데 없는 이야기를 2시간 넘게 한 뒤에 드디어 그녀는 말문을 열었다.


 여자는 '주변에서도 그렇고 늘 챙겨주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한번 진지하게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고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관계가 이어지는 것은 어떨까 하고 돌려 말했다. 남자는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독신주의는 확고했고, 형의 이혼 문제로 결혼에 대한 반감은 커질 대로 커져있었다. 늘 밝았던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그럼 그 누구와도 연애할 생각이 없냐'고 확인 사살형 질문에 던졌고, '연애를 하게되면 상대는 결혼을 생각하게 될 것인데 그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선을 그었다. 이후 그녀는 더이상 그에게 묻지 않았다. 십수년간 알고 지낸 그는 상대에게 관심이 없다고 '독신주의자'라고 둘러댈 만큼 의뭉스러운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동안 머리가 멍해졌다. 십수년간 이어진 관계가 아무 관계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허무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했던 그의 행동은 순수한 우정이었던 것일까. 순간 착각하게 만든 그도, 착각한 자신이 또 밉고 싫었다.


 그렇게 그 둘의 관계는 정리가 되었다. 다행히 어색하지 않게 둘은 다시 친구로는 지낼 수 있었다. 다만 여자는 이제 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제 진짜 나혼자구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현실을 마주한 여자의 마음은 복잡했다. 자신과 그가 그토록 찾던 운명의 상대일수도 있다는 것도 자신의 착각이었고, 십여년간 계속된 둘이 운명의 상대일 수도 있다는 것 역시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 역시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남사친은 환상일 뿐이었다.


 물론 허무한 마음도 들었지만, 마음의 준비를 한 탓인지 생각보다 쉽게 정리됐다. 오히려 '남사친' '여사친'으로 관계가 애매했을 대보다 분명히 하고 나니 마음이 더 후련해졌다. 그리고, 더이상 그를 염두해 두느라 다른 관계까지 영향 받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그래도 둘의 친구 사이가 깨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홀로서기에 매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리속에 깊이 자리잡은 '연애 강박증'을 털어내기로 했다. 한살이라도 어린 나이에 누군가에세 선택받고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야만 한다는 강박감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런 불안감이 폭넓고 다양한 인간 관계를 그릇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포기'라고 하겠지만, 생각의 전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마음생각하고 쿨하게 돌아섰다.

 '그래도 나이 들어서 기댈 친구 한명은 있으니 그것에 만족하자.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좀더 집중하자. 그리고 더이상 환상과 착각에 기대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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