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 사는 지인과 주고받는 편지 연재 예고 및 소개글입니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생각해봤어요. 제 삶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는데 말이죠. 만약 모범생의 범주가 원으로 그려져 있다면 저는 선에 겨우 맞닿을 만한 거리에서 작은 점으로 존재할 뿐이었어요. 대학생이 되면서 맥주를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키스의 맛을 알아버렸고요. 용기가 생겼을 무렵 미국으로 떠났어요.
그제야 세상을 보기 시작했을까요. 한 번 두 번 훌쩍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보니, 제 주변에는 온통 여행자들로 가득 해지더라고요.
주로 머물던 일터의 일상에서는 간혹 저를 돌연변이 취급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 삶을 차지하는 세상의 일부에서 저는 평범한 여행자일 뿐이었지요. 멋진 사람들이 많아요. 멋진 여행을 멋지게 해내는 여행자들은 이토록 멋져 보일 수가 없어요. 손가락으로 최고의 여행자를 꼽아보자니 그건 안 되겠어요. 하나같이 낭만적이고 고독하고 아름답거든요.
린다 언니는 그중 한 명이었어요. 여행 이야기는 항상 즐겁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여행기는 입맛 다시며 들을 수밖에 없는 감칠맛 나는 이야기였어요. 린다 언니를 처음 만난 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비밀로 묻어둘게요. 그녀는 그 날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크기가 다른 인형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선물상자처럼 '여행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제 삶에 들어올 무렵이었어요.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는 못해도 스피커가 뿜어대는 음악에 취해 어깨에 리듬을 실어보는 그런 날들 중 하루 말이에요.
어느 날 그녀는 쿠바로 떠났어요. 훌쩍 떠나는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예상하셨겠지만 그녀에게 영어와 스페인어 정도는 기본이에요. 한 달여 쿠바를 여행한 뒤 돌아온 그녀는 퇴사 혹은 장기 휴가를 계획하며 쿠바에 두세 달 정도 다시 다녀와야겠다 말했어요.
그곳에 두고 온 것이 있다고 했어요.
마음... 같은 것이었을까요?
훗.
쿠바 한 달 여행이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한국으로 돌아오기 단 며칠 전에 말이에요. 그녀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대요. 키도 덩치도 그녀의 두배는 족히 될 만한 그가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건넨 첫마디는 "원래 이렇게 아름다우셨나요? 눈이 부셔요." 같은 영화 속 대사는 아니었어요.
그는 대화를 원했어요. 같은 언어로, 생각을 나누기 위해.
"스페인어 할 줄 알아요?"
"Sí"
그날은 그렇게 아바나의 말레콘 비치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요. 이쯤 되니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요?
서로 알아갈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갈 시간을 충분히 갖기로 결정했던 거예요. 그렇게 다시 쿠바에서 몇 달을 보내고 돌아와 조금 더 확신을 가졌어요.
이번에는 그를 한국에서 몇 달 살게 해 볼 작정이었어요.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죠.
서울대학교 한국어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며 지낼 예정이었지만 쿠바 사람이 한국 비자받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쿠바는 대한민국과 수교를 맺고 있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거든요.
그가 한국에 오기까지, 비자를 받기까지의 여정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드라마예요.
조단의 어학당 기간이 끝날 무렵, 바로 쿠바 이민을 결정할 그 무렵에 그들은 서로의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기로 약속했어요. 그들의 결혼식 역시 영화 속 한 장면 같았죠. 푸르른 숲 전체에 해가 지도록 아름다운 음악이 퍼져나갔어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말레콘 비치에서처럼.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대신 많은 이들의 축하와 축복의 인사가 밤새도록 이어졌어요.
그들이 각자 배낭을 이고, 커다란 트렁크를 서너 개 싸들고 한국을 떠난 지 벌써 5개월 정도가 되었네요. 쿠바에서도 한번 더 결혼식을 올린 린다 언니와 조단은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계획 중에 있어요. 조바심 내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언니의 성향은 지금의 저와 조금 닮아있네요.
쿠바에는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아서 마음처럼 자주 안부를 주고받을 수 없었어요. 인터넷 공원이라고 하는 곳에 가는 날 서로 길게 써두었던 편지를 주고받았지요. 한국에서처럼 인터넷을 하거나 TV를 보는 시간 대신 일기를 쓰거나 심지어 시를 쓰게 되었다며 저에게 보내주기 시작했어요.
편지를 받고 한껏 여운을 느끼느라 바로 답장을 하지 않아도 우린 서로 보채며 채근한 적이 없었어요. 서로의 사정을 예상하고 인정할 수 있는 릴렉스한 부분이 저는 특히 좋아요.
이만하면 쿠바에서 온 편지를 기다릴만하지 않나요?
여러분도 저와 함께 기다려보지 않으시겠어요?
:-)
*
브런치 매거진은 각각 구독해주셔야 알람이 간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