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 혼인신고는 진작 했었지만...
*<쿠바에서 온 편지> 매거진은, 쿠바에 여행 갔다가 쿠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쿠바로 떠나버린 린다 언니와 제가 주고받는 편지입니다. 매거진 첫 번째 편인 소개글부터 읽으며 쿠바에서 보내온 이야기를 함께 공감해주세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린다 언니도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답니다. <쿠바에 살아요>라는 매거진을 발행하여 소식을 전하고 있으니 쿠바에 관심 있는 분들은 놀러 가 보세요.
*저와 주고받는 이 편지 매거진은 10편으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쿠바에서 보내는 편지 #5
From Linda
에린아,
지난 편지에서 보내준 통영 사진을 보니 통영 처음으로 갔을 때가 생각이 나네. 굴을 못 먹던 내가 통영에서 굴을 먹은 이후로 너무 맛있어서 그때부터 겨울이면 굴을 찾아서 먹었거든. 훗
겨울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내가 한국의 겨울이 생각날 만큼 이 곳은 달이 바뀔 때마다 기온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 낮에 외출 한 번 했다 하면 기운이 쑥 빠질 정도야. 한편 비도 자주 내려서 나갈 때에는 항상 우산을 챙겨. 비가 오지 않아도 양산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지. 양산을 쓰지 않으면 햇볕이 뜨거워서 노란 내 피부가 금세 초콜릿색이 되어 버리거든. 올해는 아직 바닷가에 놀러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까맣게 구워져서 어깨 끈 자국이 선명해. 낮에는 더 이상 끈으로 된 옷을 입고 나가는 게 두려워져. 잉…
그래도 얼굴에는 선크림을 바르고 나가는 데 선크림을 바른다고 자외선이 백 프로 차단되는 게 아니잖아. 다른 이들보다 멜라닌 색소 반응이 빠른 내 얼굴은 까맣다 못해 얼룩덜룩 해져서 울 엄마가 보시면 아마 기겁을 하실 듯 해. 물론 못 보시니 다행이지만. 내가 봐도 걱정이 되어서 아침저녁으로 쌀뜨물로 세수를 하고 있어. 그렇다고 에린이처럼 하얗게 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촌스러운 까매짐과 얼룩을 늦춰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해서. ^^
내가 이 곳에 도착한 지 6개월의 마지막 날에 드디어 영주권 신청을 하게 되었어.
이 곳에 오기 전 계획은 당연히 영주권을 ‘먼저’ 신청하는 거였는데, 처음 2~3개월 동안 ‘쿠바’라는 나라의 실체와 현실을 점점 알게 되면서 ‘내가 과연 이런 사회주의 국가에 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엄청나게 되더라고... 지난 2월의 어느 날에는 조단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어. 이 곳에 사는 게 너무 무섭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쿠바에서 살겠다고 한국에서의 삶을 입술이 터져가면서 정리하고 송별회란 송별회는 다 하고(시간이 모자라서 덜 했지만), ‘모두 쿠바에서 만나요!’ 하고 왔잖아. 그런데 몇 개월만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창피할 것 같았지.
사실 조단이랑 제3 국으로 가는 대안도 생각해봤어. 1순위는 내 사랑 지중해에 있는 스페인이었지. 스페인 이민 등 여러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하니 역시 쉬운 게 아니더라. 그러다 시간이 흘러가고 나도 점점 쿠바의 삶이 조금씩 적응이 된 거야. 안정이 되기 시작하더라고. 그래서 일단 ‘올해는 쿠바에 살아보자’라고 마음을 다잡았어.
‘이왕 살 거면 영주권을 신청하는 게 낫겠다’라는 판단이 들었고, 결심을 내렸지. 모든 서류가 준비된 후, 드디어 영주권 신청을 했어. 보통 영주권 신청 후 6개월 후에 영주권과 거주증이 나온다고 해. 영주권이 나오면 내 명의로 이 곳에서 집을 살 수가 있어. (물론 집을 구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아주 저렴한 돈으로 배급도 받을 수가 있어. (배급 품목이 많지는 않아 ^^;)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건, 각종 박물관, 미술관, 극장 등을 쿠바인이 내는 금액으로 이용을 할 수가 있다는 거야. 예를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립미술관 쿠바관의 입장료가 외국인은 5 CUC인데 내국인은 5MN 이거든. 대부분의 입장료가 외국인보다 내국인에게 24배 저렴해.
내국인 전용 여행자 버스(옴니부스)도 탈 수 있어. 조단 고향인 Villa Clara라는 곳에 가려면 내국인 전용 여행자 버스를 타야 하는데 나는 승차 불가라 아직 못 가봤거든.
영주권 신청하는 그 날은 정말 너무너무 더워서 선풍기 하나 없는 야외 대기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등짝에 땀이 줄줄줄 흘렀어. 내가 이 정도면 조단은 땀으로 샤워를 할 정도인데 그 땡볕에 또 공증 사무실까지 다녀왔으니 옷이 땀범벅이 되었지. 집으로 가는 길에 조단에게 “우리 오늘 특별한 날이니까 레스토랑에 가서 밥 먹을까?”라고 했더니 “아니, 나 빨리 집에 가서 샤워하고 싶어!”라고 할 정도였어.
영주권을 신청한 그 주 일요일에 영주권 서류에 도움을 준 분들을 집에 초대했어. 매운 걸 잘 못 드시니까 닭튀김, 쿠바식 콩요리, 흰밥, 볶음밥, 불고기, 파전, 샐러드 등을 또 땀 뻘뻘 흘리며 준비를 했지. 다들 너무 맛있다며 하나도 남김없이 싹 비우셨어. 특히 파전을 아주 좋아하시더라고. 요즘 파가 아주 싱싱하고 구하기가 쉬워서 파전은 쉽게 할 수 있어. 그래서 앞으로도 쿠바인을 초대하면 파전은 꼭 하려고 해.
며칠 전에는 시장에 갔더니 시들시들한 배추가 몇 포기 보이길래 또 냉큼 사서 집에 와서 겉절이를 담았어. 아는 동생이 준 매실청을 넣었더니 맛이 지금까지 중 최고인 거야. 배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두 포기 중 버린 잎도 꽤 되는데도 양이 많았어. 아는 한국 분들께 조금 드리고 매일 밥이랑 겉절이를 먹고 있어. 쪽파를 사서 파김치도 했는데 어쩜… 처음 해 본 파김치가 너무 맛나서 혼자 감탄을 어찌나 했던지... 울 엄마 파김치를 아주 좋아하는데 바로 그 맛이었어!
아… 집은 계속 보고 있는데 아직 집은 못 구했어. 이제 영주권 신청은 완료했으니까 집만 구하면 한 시름 놓겠어. 상반기는 넘어갔고 하반기에는 집을 구하고 집수리까지 완료하는 걸로 한번 기대해 볼래.
에린이도 한국의 아름다운 날씨 맘껏 즐기고 매일이 행복한 날 되길 바라!
P.S.
작년 12월에 쿠바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혼인신고였잖아. 한국과 멕시코에서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쿠바에 있는 공증 사무실에서 혼인 신고를 했던 그 힘들었던 과정 알고 있지?
혼인신고를 한 후에도 다른 관광객들처럼 매달 비자를 연장하고 3개월마다 쿠바를 떠나야 되는 줄만 알고 있었어. 그래서 3월에 멕시코에 갔었고, 이번 달에도 멕시코 가려고 예약을 다 해 놓았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혼인신고를 하고 나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야.
영주권 신청을 마치고 질문이 있냐고 해서 우리 대화가 시작되었어.
“영주권 나올 때까지는 지금처럼 매 달 비자를 연장해야 하고 3개월마다 나가야 하는 거죠?”
- “잘 들어요! 작년까지는 혼인신고를 하면 6개월 동안 있을 수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1년으로 늘었어요. 그러니 1년 동안은 안 나가도 되고 원하는 개월 수만큼 비자 연장을 할 수가 있어요. 물론 인지대는 연장을 원하는 달만큼을 내야 하고.”
“뭐라고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다음 달에 멕시코에 가는데…”
-“본인 볼일 보러 가는 거지 비자 때문에 가는 건 아니겠죠?”
“네, 물건 공수하러 가는 거예요..."
이 곳은 묻지 않으면 정보를 주지 않아. 물어본다 해도 정보가 잘못된 경우가 종종 있어서 중요한 일은 여러 명에게 질문을 해서 그중에 공통된 답을 채택을 하곤 해.
삼 개월마다 멕시코에 가서 인터넷도 맘껏 하고, 한국 민박집에서 수다도 맘껏 떨고, 맛난 한국음식도 먹으며 필요한 물품들 공수도 하고 콧바람도 쐬고 하는 건 좋은데, 매 달 출입국에 가서 비자 연장하는 건 그야말로 시간 낭비라 안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거든. 이제 알았네. 안 해도 되는 일을 6개월간 해왔다는 걸.
조단이랑 나랑 둘이 얼굴 쳐다보며 황당해서 결국 피식 웃었는데 이것도 쿠바니까 이해하고 넘어갔어.
한국에서 보내는 편지 #5
From Erin
언니가 대성통곡을 하며 고민한 날들이 있었다는 글을 읽고 마음이 아팠어. 서울에서의 화려한(?) 삶을 뒤로하고 선택한 삶인 만큼 그걸 이겨내려는 노력이 너무 대견해.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언니가 한 결심을 실행에 옮기며 차근차근 해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해졌어.
이 곳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어. 얼마 전에 브런치에서 이런 글을 읽었어. 일주일의 매일을 오전/오후로 2 등분하여 14개의 슬롯으로 쪼개는 방법을 사용해보라는 게 핵심이었지. 30분에 해결할 일을 2-3시간 이상 들여서 마무리한 경험이 있다면 시간에 대한 감수성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야. (출처: 맥스 Max '창업가의 시간은 14개다')
나도 더 이상 출퇴근 시간에 맞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새로운 일에 대한 준비기간을 정당방위로 내세워 숱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 아니, 알고 있던 사실이 다시 한번 아프게 나를 꼬집었을 뿐이지. 지금까지 쉬지 않고 바쁘게 일을 해왔으니 조금 쉬어도 되지 않을까 라는건 안일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다시 읽었어. 주인공 폴이 거울을 보며 얼굴을 서른아홉 해로 나누어 생각해본다는 장면을 상상해봤어. 나는 요즘 거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새로이 다가온 시몽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폴의 결심에 끄덕였어. 관성적인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 제자리로 돌아가버린 폴을 이해하는 나이가 돼버린 거야, 나도. 하루 24시간, 일주일과 한 달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감에 초조해지는 요즘 이거든.
막연히 우울하거나 슬픈 건 아니었는데, 그런 분위기를 풍겨버렸네. 언니 옆에 앉아 와인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으로 쓰고 있어 그런 걸 거야.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내 감정선을 건드린 것 같기도 하고. 언니가 나에게 곧잘 하던 말, "넌 너무 감성적이야."라는 말이 생각나 웃어버렸어.
우리에겐 할 일이 있으니. 하루에도 몇 번씩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을 단순화해야지. 그렇게 시간을 아끼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시간에 대한 감수성을 재고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