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 에세이 #20
지난밤에는 샴페인을 마시며 영화 한 편을 보는 호사를 누렸다. 샴페인을 마시고, 로제 와인까지 조금 더 마셨더니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수밖에. 오늘은 리스본에서 걷는 날로 정할까 하다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지막 타임으로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 새콤한 오렌지 주스를 두 잔이나 마셨다.
'호시우역으로 가자. 신트라에 다시 가볼까.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11시 1분에 출발하는 신트라행 열차에 올라탔다. 늦을까 봐 걱정하면서도 급히 챙겼던 책을 꺼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페소아의 리스본>을 읽었다. 창 밖을 보다가, 책을 읽다가, 기차 안을 둘러보는 행위의 반복은 행복한 그 무엇 이상이었다. 옆 자리에는 노부부가 두 손을 꼭 붙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여행에 관한 이야기였다. 음악을 잠깐 멈추고 엿듣는 그들의 이야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풍성해진다. 기차의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그윽하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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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신트라 기차 (원데이 패스) : €16
원데이패스를 이용하면 신트라 마을버스까지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40분쯤 지나 신트라 역에 도착했다. 페나성(Palácio da Pena)으로 가는 434번 버스를 타기 전에 작은 카페에 잠시 들렀다. 사실은 역 내에 화장실이 없어 대안으로 찾은 곳이었다. 1유로짜리 에스프레소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시켜서 테이블에 앉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스본에서 신트라, 그리고 호카곶까지 하루에 다 둘러보는 여행코스를 짜는 것 같았는데 그건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 그럼 이렇게 카페에 들르느라 버스를 두 번이나 그냥 보낼 시간은 없었겠지. 신트라 역 귀여운 커피가게에 들르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얼굴들이지만 설렘으로 한껏 달뜬 눈빛을 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기억한다.
2017년 8월에도 페나성을 여행했었다. 어떤 사람은 동화 속 궁전처럼 아름답다 말하고, 어떤 사람은 관광지 상품처럼 붐비는 곳이라 싫다고 말한다. 렌터카 여행으로 운전해서 올라갔던 신트라 산속에 우뚝 솟은 페나 궁전은 내게도 그리 예쁘게 기억된 곳이 아니었다. 한여름 얇은 원피스 한 장을 걸치고 찾았던 그 날의 바람은 몹시도 차가워서 심술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내가 더 추워.' 같은 유치한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투고 말았다. 노랗고, 빨갛고, 파란 선명한 색깔 대신 흑백 필터라도 씌운 듯한 흐림으로 기억해버린 것이다.
2019년 2월에 다시 찾은 페나성은 페인트칠을 다시 한 걸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색깔이 선명했다. 청명한 겨울 공기를 뚫고 쏟아져내리는 햇살은 여름의 그것보다 뜨거웠다. 외투를 벗고 신트라 정원을 걷는 내내 초록 나뭇잎이 반짝거리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차르르 소리가 났다.
원래 수도원이었던 터에 지어진 신트라의 페냐 성은 새롭게 개조하여 왕족의 가족들이 여름철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동화책에서 팝업처럼 튀어나온 것만 같은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별궁으로 사용하던 것을 페르난두 2세(Dom Ferdinand II) 왕이 두 번째 왕비인 마리아 2세 (Maria II)에게 선물로 바치며 성(Palace)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 그냥 예쁘기만 할까? 마누엘(Manueline) 양식, 고딕(Gothic) 양식, 이슬람(Islamic)과 르네상스(Renaissance) 양식 등 여러 가지 양식이 조화를 이루며 더욱 완벽해진 이 곳은 영국의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 에덴동산이라고 표현했으며, 신트라 도시 전체를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데 한 몫 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입장료
페나성 외부 가든 €7.5
페나성 내부까지 €14
미니 셔틀버스 €3
신트라성 내부는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왕족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살려놓았다. 역사적 유물 등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편이지만 페냐 성은 달랐다. 성벽을 장식하는 아줄레주 타일, 10개 남짓 있는 왕족의 방, 그리고 그 방을 장식하는 고가구의 디테일, 스테인글라스 창문, 샹들리에와 크고 작은 도자기 등의 인테리어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신트라에서는 페나성보다는 헤갈레이라 별장 (Quinta da Regaleira)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곳이다.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들이 페냐성만 둘러보고 헤갈레이라 별장은 생략해버린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방문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약간 경사진 오르막길을 10분 남짓 걸어 도착할 때쯤엔 이미 해가 지려는 참이었다. 별장이 주는 으스스한 느낌 때문인지 살결에 닿는 바람이 더 차게만 느껴졌다. 별장을 둘러싼 정원 곳곳이 마치 랜드마크 인양 볼거리들로 가득했는데, 마감시간이 있어 마냥 여유를 부릴 수만은 없었다.
기사단의 신화 이야기나 마법의 전설이 떠오를법한 이 곳은 원래 개인 별장이었다. 개인 별장이라고 하기엔 자연의 축소판 같은 큰 규모에 동굴, 연못, 우물, 정원과 교회 등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숨은 장소로 가득해서 마치 어른들을 위한 놀이 공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입장료
€8 (1년 만에 2유로씩 오르는 중)
€12 (오디오 가이드 포함)
리스본에서 약 30km 떨어진 소도시, 신트라서 놓치면 안 되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마을을 다 둘러보는데 1시간 채 안 걸리는 작은 마을 골목 탐방의 재미를 놓칠 수 없지. 그림책을 볼 때 느끼는 정다움 같은 따스함이 발길 닿는 돌바닥에서부터 느껴진다. 골목이 꺾이는 곳곳에 버스킹 연주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친다. 겨울 해가 금방 지고 말았더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연주자들은 외로워 보이기도 하였지만 외로움과 그리움은 아름다움과 늘 함께였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념품샵 몇 군데를 들러 흥정을 하기도 하고, 맛있는 빵 냄새가 나는 가게를 기웃거리기도 하며, 그렇게 발걸음이 느려지더니 결국 돌아가는 기차를 놓칠 뻔했다.
* 직접 찍은 페냐성 드론 영상
포르투갈 브런치북에서 이어지는 매거진입니다 :-)
방문과 공감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