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꼰을 가득 메운 사람들
2월 15일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새벽빛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침대 왼쪽으로 다리를 옮겨 스삭스삭 슬리퍼를 찾았다. 눈은 반쯤만 뜬 채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아앗!'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주저앉고 말았다. 쿠바 여행 15일째 아침이었다.
여행 중에는 더 많이 걷느라 간혹 종아리가 아픈 날은 있었지만 발바닥이 아픈 적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하루를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스마트폰 검색을 했다. 아침에 첫 발을 내딛을 때 극심한 통증을 느낀 경우에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며칠 걷기가 힘들 수도 있단다. 편평하고 납작한 신발을 신고 갑자기 오래 걸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라나. 이렇게 하루를 날려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정보를 모아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새벽 어스름이 채 밝히지 못한 까만 방에서 새어 나오는 스마트폰 불빛을 받으며 스트레칭을 한 시간쯤 했던 것 같다.
'휴...'
조금 나아졌고,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그제야 기지개를 켰다. 이번 여행을 위해 저렴하게 구입했던 쪼리가 문제였을까. 아하. 어젯밤에 나는 그 납작한 쪼리를 신고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했지. 말레꼰 따라 하염없이 걸었던 것도 모자라 그 납작한 쪼리를 신고 꽤 높이가 있는 138계단을 올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숙소의 엘리베이터는 11시가 되면 운행을 멈추었다. 밤이 깊어가도록 쿠바인들이 즐기는 밸런타인데이 축제 열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부지런히 걷고 보며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는 날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어떠한 형태의 기념일 -심지어 나의 생일도- 을 챙기는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밸런타인데이를 쿠바에서 맞았으니 더욱 맹숭맹숭하기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웬걸. 쿠바인들은 밸런타인데이를 1년 중 최고의 축제로 손꼽을 정도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감사하며, 제이와 함께 조금은 화려한 식사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크리스마스때보다 더 신나는 파티가 쿠바에서 열리고 있었다. 금, 토, 일요일 3일간 아바나는 사랑의 열기로 들썩였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친구 심지어 쿠바라는 나라에 대한 사랑까지 표현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그들은 마지막 일요일 밤이 지나가는 것을 그냥 둘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불빛이 적은 도시, 유난히 까만 밤에 그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오래도록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먹거리 장터가 열렸다. 바닥에는 빈 맥주 깡통이 굴러다니기 시작할 즈음 거리에서 흥은 절정에 달한다. 대낮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은 지칠 줄 몰랐다. 낮에는 올드 아바나의 오비스포 거리에서 장미꽃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밤이 되니 센트로 아바나 거리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컬러풀한 색감의 옷을 입은 그들의 패션 센스를 쫒느라 눈을 어디에 둘 지 모르겠더라.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며, 그렇게 춤추고 노래하고 포옹하며 시간을 쓰는 그들은 전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는 이방인이 '올라!'하고 인사하면 아무렇지 않게 '올라!' 하며 웃어줄 뿐이었다.
말레꼰을 향해 걷던 길가에서 한 소녀가 BTS 포스터를 펼쳐놓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가울 수밖에! "BTS? BTS!"라고 외치며 까르르 웃는 소녀에게 내내 들고 다니던 BTS엽서를 꺼내어 선물로 주었다. 별거 아닌 엽서 한 장으로 3형제와 옆에 있던 그들의 부모는 행복해졌다. 밸런타인데이였다.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의 일부가 될 수 있어서 내게 더 행복한 순간이었어.
아바나에서 머물고 있는 숙소는 낡은 건물 7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창문을 열면 말레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끝내주는 작은 방이었는데,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밤 11시가 되기 전에는 숙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신데렐라가 된 기분으로 밤 10시 50분쯤 되면 뛰어 들어가곤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다소 허무하다.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수동으로 운행하는 엘리베이터가 밤 11시에 중단되기 때문이었다.
'겨우 엘리베이터 때문에?'라고 단정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낡디 낡은 건물의 높은 층계를 138개나 오른다는 게 생각보다 쉬워 보이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것도 하루를 마감하는 한밤중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이 날만큼은 자정을 넘어야 마땅한 날이었다. 밤 11시가 되기 전에 숙소에 들러 짐을 내려놓고 맨 몸으로 다시 내려오기로 했다. 밤 10시 50분에 다시 밖으로 나가겠다는 나에게 엘리베이터 담당 할머니는 "11시!"라고 짧고 굵게 외치셨다. 그간 얼굴을 터놓고 지냈으니, 다시 한번 시간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다. 할머니는 무뚝뚝했다가도 팁으로 단 1 cup (쿠바 현지 화폐로, 약 50원)만 드려도 금세 활짝 웃으며 이것저것 알려주시던 분이다. 하얀색 뽀글 머리에 하얀색 컨버스화를 신은 할머니는 누구나 되고 싶은 귀여운 할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짧은 포옹과 함께 굿 나잇 인사를 나누었다.
"Buenas noches!"
사실 우리의 밤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요즘 브런치가 뜸했지만 마음만은 브런치에 와있었어요.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모두 운영하다 보니, 출간 후 홍보 활동으로 정신 없기도 했고요. 벌써 출간한지 3주가 지났네요. 어찌된 일인지 교보문고 대부분의 지점에 '여행 분야' 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답니다! 언제 내려갈지 모르는 베스트셀러 코너이긴 하지만 한 번이라도 올랐다는 사실에 가슴 뭉클함을 느끼며, 저는 계속 쓸거예요. 돌아오는 주에는 감사한 우리 브런치 작가님들께 더 많이 방문할게요.
사회적 거리두기와 슬기로운 집콕생활도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