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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n Chon Aug 04. 2022

매일 : No.4

2022년 8월 4일

Day Seventy-Five, No.4, 전이린, 종이 위에 색연필, 21 cm X 29.5 cm, 2022


기록의 형태는 반드시 문자일 필요가 없다. 글자가 발명되기 전엔 그림으로 기록을 남겼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간을 그림'이 아니라 '시간을 기록함'이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고, 그래서 종이를 고집한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종이는 300g/m² 이상의 무거운 수채화지이다. 특히 표면 질감이 아주 부드러운 세목(Hot Press)을 선호한다. 그래야 가는 선이 잘 표현되고, 작은 숫자들이 잘 보인다. 종이는 낱장씩 만들어진 경우 Deckle-edge라고 불리는 자연스러운 가장자리를 가지고 있다. 단점은 몇 가지 정해진 사이즈만 구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Roll에 말려있는 대형 사이즈를 사서 원하는 크기로 잘라 사용한다. 이때 칼로 날카롭게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투박한 나무 막대기 같은 걸 이용해서 거칠게 잘려지게(뜯겨지게) 모양을 만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핸드메이드의 특유의 Deckled-edge의 자연스러움은 겨우 흉내 내는 정도이다. 프로젝트 '매일'을 시작하면서 Roll에 말려 있는 종이를 A4 사이즈로 미리 잘라두었다. 종이를 준비한다는 것은 '시작'을 의미한다. 종이는 Grain 방향으로 고집스럽게 말려있다. 물을 가볍게 스프레이 해서 평평한 테이블 위에 붙여 놓으면 잘 펴진다. 수채화 종이의 표면은 물의 흡수 정도를 조절하기 위해 전처리 (Sizing)가 되어 있는데 젖은 상태에서는 조직이 느슨해졌다가 마르면서 다시 형태를 갖춘다. 한번 Roll 상태로 말린 종이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완벽하게 평평한 상태가 되지 않는다. 프레스 같은 것에 아주 오랫동안 눌러 놓지 않는 다면 말이다. 세상 귀찮은 이 과정을 이번에도 역시 생략했다. 책상 모서리에 말려진 반대 방향으로 몇 번 쓱쓱 문질러서 대충 폈다. Wet Medium을 사용한다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연필이나 색연필 같은 Dry Medium으로 그릴 경우에는 종이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 귀찮음의 결과는 더 많은 노동의 시간을 가져온다. 내가 물처리 과정을 하지 않는 핑곗거리 중 하나는, 물을 뿌리면 표면의 매끈함이 감소되고 가늘고 곧은 선들이 종이의 섬유질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스무 장 정도만 잘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책 'Rene Magritte'의 화보집을 올려놓았다. Magritte의 철학적 무게가 내 종이들의 자기주장을 누르고 달래서 새로운 그림을 받아들일 만한 상태로 변화시켜 주길 기대하면서.


시간. 이것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Day Seventy-Five, No.4, 전이린, 종이 위에 색연필, 21 cm X 29.5 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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