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이 Vol. 04
이전에 '글장난과 글쓰기'라는 글을 썼다. 스스로 하고 있는, 혹은 해왔던 글쓰기에 관해 고찰하는 내용이었다. 당시엔 결언에서 기억문화라며 다소 거창한 의미를 부여했으나, 훨씬 범박하게 그 정의를 구분해 본다.
나만 읽는 글이라면 글장난
타자를 상정하는 글이라면 글쓰기
브런치 활동이 꼭 독자를 모집하고, 숙독을 권하려는 의도를 가지진 않는다.
SNS보다 긴 호흡의 글을 쓰고 싶은 사람,
농반진반으로 퇴사 후 작가의 꿈을 품는 사람,
광고와 이웃이 먼저 조명되는 타 플랫폼에 염증이 생긴 사람,
내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퍼트려 사회를 설득하고 싶은 사람,
그저 자신의 탁월성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
자각이 어떠하든 간에 정답은 없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 자신의 사유를 나눈다.
일기장에는 비속어든, 줄임말이든 언어의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이 온전히 나에게만 부과된다.
그러나, 타인이 엿본다는 기대감의 공포가 스며들면 한층 정제된 집필이 행해지기 마련이다.
남이 읽기 편한 글을 쓰진 않는다.
기계적인 좋아요 버튼의 작동이고, 브런치 홈에서 스쳐 가는 수많은 일면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럼에도, 공동체에서 나 아닌 다른 이를 전제한다면 그야말로 글쓰기다.
글 한 편에 드는 품은 크다.
물리적 시간도 오래 걸리거니와, 한 편의 글에 진심을 다하려면 일개 단어와 문장의 선택부터 난관이다. 아무리 목적이 있고, 즐겨서 쓰는 글이라도 자기만족은 해야 한다는 욕심이 생기니 생각 정리 자체가 고통의 병렬이기도 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전문 작가, 혹은 생활 영위를 걱정하지 않고 세상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예술가는 아니다.
글쓰기로 수입을 창출하는 '직'의 기자나 칼럼니스트처럼 몇 꼭지 글을 송고해야 하는 기한 또한 없다.
페이스북 현안 메시지와 논평 작성이 일상인 정치인들처럼 공적인 권위를 가지는 글도 아니다.
그렇기에 삶을 살아가며 글을 쓰는 건 시간 덩어리의 낭비처럼 느껴질 수 있다.
길바닥에 버려져 누구나 읽을 수야 있지만, 역설적으로 아무도 읽지 않는 일기장이라는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더군다나 학자들마저 생성형 AI 도움 받은 칼럼을 신문사에 보내고 데스크에 걸릴까 조마조마했더니 오히려 글이 더 매끄러워졌다고 한다는 시대가 도래했으니 '직'이나 '업'이 아닌 취미와 특기로써의 글쓰기는 사장될 수 있다.
가장 쉽게 와닿을 예시를 들자면,
학업, 취업 준비, 직장 프로젝트, 재산 관리 등 현실에서 헤쳐나가야 하는 과업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귀를 닫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으면 누구나 불안해진다. 굳이 글로 안 써도 다 아는 얘기를 인터넷의 용량으로 낭비하는 듯해 미안하고, 단기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아린다.
그럼에도,
글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는 그 순간만큼은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얽매이는 재단 없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우리에게, 삶을 마주하는 지평에서의 도야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어떤 글을, 어디에 써야 할까?
내밀함을 드러내는 결단에는 그만한 용기가 따른다.
만용과 비겁 사이에서 중용을 견지하는 만큼 용기가 값지게 발현이 되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최소한 글이 왜곡되지는 않아야 한다.
가장 먼저 글쓰기의 목적을 세운다.
나는 글을 왜 쓰는가.
의식 정리를 통한 향상심이 정확한 문제풀이다.
여기에 인문학을 공부했다면 '보고, 사고하고, 비판하고, 글을 쓰는 힘'을 길러 지성인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선대가 세상을 해석해 온 기법을 익힌 만큼, 나만의 방식으로 독자적으로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게 지성인의 숙명이다.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보단,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그 본질을 채워나간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리. 기술 발전에 이바지해 인류의 공리를 증진함은 다른 지성의 업으로 남겨둘지라도.
무엇보다 나의 정체성으로 사람과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서사를 나의 언어로 체계적으로 풀어내는 ‘기록가’
를 자처하고 있기에 글을 쓸 당위성은 이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꼬리물기 질문 하나가 더 뻗어 나온다.
"글쓰기를 특기로 키워내서 팔리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젠가 나의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겠다는 목표는 접어두고, 지금 시점에서만 생각한다.
어쩌면 시장 가치를 생각해야 하니 내 글쓰기가 노동으로서 어떤 상품을 생산하고자 하는지 다소 실용적으로 접근해 보는 일이겠다.
다시 말해, 커리어에 글쓰기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 - 이 말이다. 상술했듯이 글쓰기와 돈벌이가 합치되지 않으면 글에 투자하는 건 상당한 리스크가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서를 비롯하여 조직에 제출하는 지원 서류처럼 성패 여부가 정해진 글쓰기는 제외한다.
**작문의 포트폴리오화는 아직 모르겠다. 디자이너/마케터처럼 직관이나 아이디어가 빛을 받는 쪽이 아니기도 하고, 등단 심사가 아닌 이상 한정된 시간에 긴 글을 읽고 있긴 평가자에게 다소 무리가 있지 않나.
내 글은 이렇게 팔고 싶다.
[1] 실명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인 나'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
[2] 타인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나의 세상'을 창조하고 싶다.
팔려면 이러한 준비가 필요하다.
[1] 글 쓰는 기계가 되기 위해 논리력, 설득력, 통찰력, 문제의식, 문제해결력을 집약한 작문 연습
[2] 지금껏 써온 글의 문법을 탈피해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독자의 흥미와 울림을 유도하는 작문 연습
[1]은 명확하다. 수많은 정치 지망생이 일단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는 일부터 시작한다. 현장 네트워킹과 병행하며 조그만 감투라도 하나 얹으면 점차 글에 반응이 늘긴 하니까 효능감도 일부분 느끼리라 생각한다. 정치가가 되기 위한 루틴으로 기상 후 시사 논평 및 스피치를 말하는 이들이 많은 만큼 일종의 취업 준비라 통할 수도 있겠다.
다만, 정치란 길의 특성상 제아무라 글을 써도 일상에서 유형의 변화 포착은 어렵다는 것이 문제겠다.
[2]는 상반된 길이다. 유년기부터 인생의 한 폭이란 단어가 아까울 정도로 지금까지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게임 <영웅서기>에서 기인한 욕망이다. RPG로서의 게임성도 물론 타 게임이 비할 바가 없는 작품이었지만, 세계관, 인물 군상, 시나리오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이만한 몰입이 또 얼마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작품이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을 지금도 고민한다. 여기에 특별히 영상 콘텐츠 시청을 즐기지 않지만, 유일하게 질리지 않고 취향을 탐색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도 받았다.
진지하게 게임 회사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해서 향후 <영웅서기> IP 획득과 리메이크, 미디어믹스 제작을 꿈꿀 때가 있다. 원작이 결국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미련이 지독하게 날 괴롭힌다.
다만, 문제는 꿈일 뿐이라는 것이겠다. 제도권 내에서 공부만 해온 지라 이런 길은 두려울 정도로 무지하다.
글 판매 준비 방안을 실전 차원에서 뜯어보겠다.
[1]을 위한다면, 당장 정치 SNS 계정부터 개설해서 논평을 올려야 할 테고 인스타 맞팔 품앗이처럼 페이스북에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친해져달라, 내 글을 읽어달라 요청해야 한다. [2]를 위한다면, 스토리 작가 취업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웹소설 연재도 선택할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될 테고. 중고등학생 때 집단으로 기획 방향과 설정을 토의하고 집필을 담당했던 팬픽이 떠오른다.
이렇게 정돈하고 보니까 지금 브런치의 서랍에서 명명한 '서세이' 시리즈는 당최 팔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니까 확신이 선다.
정량적인 준비가 인정받기엔 더 주효할 수 있음에도, 저항하고 싶다.
그때, 서류가 담지 못한 시간에 방황해서 좋았다는 말을 남겨야지.
<서사서기>에서는 '안 팔리는 글'을 이어가려 한다.
지금쯤 읽었으면 이 글이 팔리는 글쓰기를 위한 강좌는 아니란 걸 당연히 눈치챘을 터이다.
사실, 브런치가 아니더라도 글쓰기란 행위 자체에 생각이 혼재된 요즘 스스로 의식을 향상하고자 하는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려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두에 질문을 던졌듯 어떤 글을 어디에 쓸지 지극히 개인적인 용도 정리를 도식적으로 해보고 싶었고, 어느 공간에서 어떤 종류의 글이 얼마나 멀리 확산이 가능한가 효율 예측도 궁금했다. 작성한 내용의 인과로 도출한 정리 결과가 아니기에 여기서 흐름상 밝힐 필요는 없겠으나, 덕분에 실타래는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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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에 내 자아를 의탁해 구성요소 중 한 명이라는 걸 인정하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내가 직접 세상을 설계하고, 구상한 원칙에 따라 기능이 작동하게 만들려는 원대한 야망을 품는다.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에 타협과 반박을 거치는 절제가 인생이다.
오늘은 이상이 현실에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