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머무는 자리
아직 새벽인가 싶어 눈을 떴을 때, 창밖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모호한 경계에 서 있었다. 흐린 풍경을 보며 조금 더 자도 되겠다 싶어 눈을 감으려다, 문득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주말과 휴일은 평일보다 더 길게 쓰고 싶어 평소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편이다. 하지만 희뿌연 안개가 온통 뒤덮은 일요일 아침은 왠지 모르게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게 했다.
투덜거림도 잠시, 아침 안개가 짙으면 곧 맑아질 징조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막연한 주술적 희망이 아니라, 내가 수없이 경험하며 체득한 자연의 순리였다. 날씨 탓을 하며 하루를 흘려보내느니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늘 가던 동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담장 위 담쟁이넝쿨이 어느새 겨울이 왔음을 감지한 듯, 제 소임을 다하고 벽에 가만히 몸을 붙이고 있었다. 저 식물조차 겨울을 맞이하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제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겨울이 오니 집안 곳곳 어머니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기 전까지만 해도 늘 김장을 했다. 힘들 테니 이제 그만하자고 만류해도 어머니는 고집스레 김장통을 채우셨다. 결국 내 성화에 못 이겨 김장을 그만두었던 그해, 어머니는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이제 와 할 수 없는 김장을 대신해 단골 가게에서 김치를 주문해 본다.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김치냉장고에 김치를 채우며, 못 이기는 척 함께 김장을 해드릴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친다.
베란다에서 정성껏 키우시던 화초들은 이제 내 몫이 되었다. 고무나무, 산세베리아, 스노우사파이어처럼 덩치 큰 녀석들을 거실 안쪽으로 들이며 잎사귀를 닦아준다. 이 적막한 집에서 올겨울 나와 함께 숨 쉴 유일한 생명체들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다. 잘 지내고 있다는 증거로 화초 사진을 한 장씩 찍어본다. 이 사진을 어머니께 보여드리면 당신의 초록색 친구들이 무사함에 활짝 웃으실 것만 같다.
서툰 솜씨로 보일러를 이리저리 눌러 점검하고, 어머니가 커튼으로 겨우 막아내던 베란다의 한기를 막기 위해 방한 비닐을 주문했다. 두 달이나 방치해 두었던 오렌지는 얇게 썰어 차로 말리고, 남은 꼬다리는 청소용 식초를 만드는 데 썼다.
이만하면 내 월동준비는 끝난 건가. 살면서 한 번도 스스로 해본 적 없는 일들을 혼자 해내며, 나는 자꾸만 "이게 맞나?"라고 자문한다. 고작 비닐을 붙이고 김치를 쟁여놓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유난을 떠나 싶다가도,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부재로 생긴 이 거대한 상실의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아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사이, 베란다를 가득 메웠던 안개가 자취를 감췄다. 안개가 머물던 자리엔 선명한 햇살이 내려앉아 거실 깊숙한 곳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거실로 들여놓은 화초들이 그 빛을 받아 반짝인다. 사람도 떠날 때가 되면 떠나고, 안개도 물러날 때가 되면 사라지며, 해는 어김없이 뜬다.
돌아보니 집안 곳곳엔 부모님의 부재만이 아니라, 당신들이 남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억과 손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툰 월동준비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비록 안개 낀 아침처럼 막막한 날들이 오더라도, 결국 볕은 들 것이고 나는 나만의 온기로 이 겨울을 무사히 건너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