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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May 05. 2016

강남내기 자문밖살이

들어가며


짧게라도 유럽 같은 데서 살아보는 것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해외여행이 주는 기분전환과 활기 이상의 다른 경험을 해고 보픈 이들의 ‘로망’이랄까. 나는 새로운 삶을 소망하며 이민이라도 가는 기분으로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딴 세상이 펼쳐졌다. 이 골목 뒤에는 또 어떤 새로운 풍경이 숨겨져 있을지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자문밖’을 산다. 자문밖은 자하문(창의문)이 위치한 한양도성 바깥쪽의 세검정 일대를 지칭한다. 이곳에서 나는 여행자처럼 이방인의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      


서울이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뜨내기’다. 우리 부모는 모두 경기도권에서 자라 상경, 강남에 진출해 나를 강남내기로 만들었지만 서울사람이라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강남은 투기바람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아스팔트 숲일 뿐이었다. 과거와는 완전히 단절된 채 현대적 요소로만 조성된 고립무원의 도시였다. 20세기 근대화의 격동기를 거치며 조부모와 외조부모 모두 조상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씨족사회를 벗어났다. 때문에 나는 윗대와의 연대감이 없었고, 나이가 들수록 내 삶이 부평초같이 느껴졌다.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해외로 떠난 이들을 이들을 차치하더라도 근대화와 식민치하를 거치며 농경사회를 벗어나 이주하게 된 사람들, 한국전쟁 통에 월남하며 3.8선 위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 산업화시대에 또다시 대도시로 떠난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느끼는 ‘디아스포라’적 감성이 우리 것 찾기 바람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생존하기 위해,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우리가 이제 숨을 좀 고르게 되자 어느 심리학자의 표현처럼 “예전에 뭐가 있었던 것 같은데”하는 공통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 같다.      


20160504 자하문 쪽에서 바라본 부암동 풍경





나의 뿌리를 확인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비어있는 듯한 허전함을 채우고 싶었지만, 철이 들자 조모와 외조모는 이미 세상에 안 계셨다. 우리 부모 자신들도 선대를 잘 몰랐다. 중고교생이었을 때 각각 아버지(조부, 외조부)를 잃으면서 그나마 출신지와의 연대도 끊어지고 말았다. 부모는 강남3구에서 반평생을 살았고, 본적지까지 이곳으로 옮겼다. 친척들도 대개 역삼동, 방배동, 구반포나 여의도 등지에 살아 이 지역을 벗어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파트촌으로 점철된 메마른 ‘신도시’가 싫었다. 나의 정서는 자꾸 소박하고 푸르른 곳을 향했지만 경제개발기를 거친 세대가 그렇듯이 부모는 아파트야 말로 현대식의 성공된 삶을 살 수 있는 곳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강북도심의 언론사에 취업하면서 청와대 인근의 개발제한지역에 마음이 끌렸다. 이 일대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신입이라 모아둔 돈도 없었고 자취를 할 만한 매물도 찾기 힘들었다. 삼청동, 북촌 일대만 빙빙 돌다가 결국 마포에 새로 지어진 오피스텔에 월세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신문사 선배를 따라갔던 자하문 일대의 풍경이 잊혀 지질 않았다. 광화문 주변 신문사에 다니는 이들은 점심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창의문(자하문) 근처 자하손만두에서 만둣국을 먹고 최규식경무관 동상이 있는 길을 슬슬 걷는 것을 좋아했다. 누런 햇빛이 찬란하던 어느 봄날 그곳에서 바라본, 인왕산자락 분지에 자리 잡은 아늑한 마을 풍경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기와지붕을 한 주택이 비탈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꿈결 같았다.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그런 조용한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음을 잡아끄는 경치였으나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내가 홀로 그런데서 살만한 거처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느꼈다. 이 지역이 그 유명한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배경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이다.      



 

20160425 인왕산 지장암(진각사) 인근에서 내려다 본 부암동 풍경


그곳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0여 년 뒤였다. 부암동. 그리고 2014년 말 나는 부암동 주민이 됐다. 빌라 꼭대기층 집은 옥상을 발코니처럼 쓸 수 있었다. 일종의 옥탑방이었다. ‘옥상옥’이라는 별칭을 주고 본격적 강북살이를 시작했다. 비록 이웃한 건물들이 있긴 하나 사방이 터진 집에서는 기억이 안 날 만큼 어렸을 때 빼고는 처음 살아보는 것이다. 나는 숨이 탁 트이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인왕산 나무군락이 가까워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삼청동, 북촌, 서촌처럼 한창 뜨는 사대문 안 진짜배기 서울은 아니었지만, 한양도성에 바로 붙어있는 성곽마을은 옛것에 대한 나의 목마름을 채워나가기에 적당한 자리였다. 때마침 마을만들기 붐이 불고 있었고, 인문학열풍과 함께 우리 것을 좀 더 알고자 하는 답사·탐방 프로그램에 곳곳에서 이어졌다. 다 찾아다니지도 못할 만큼 많은 행사와 축제가 벌어진다.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받아 무료로 운영되는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의 여지가 있긴 했지만,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과 맞물리며 ‘역사문화도시’ 서울의 진면목을 한껏 누릴 수 있게 됐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진 한국인인지를 몸소 느끼고 배우며 내 삶이 더욱 풍요로워졌다. 메마른 아파트촌에서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받아온 세대인 나의 지식은 대개 피상적이었다. 부암동에 살며 나는 ‘이 땅 위를 살아간 선조들’과 같은 표현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를 직접적으로 체감했다. 역사 갈피갈피의 배경이 된 영토를 걸으면서 나의 삶 역시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작은 일부임을 느꼈다. 오래전 이곳을 살았던 조상들도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을 가졌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삶의 양식이 어떻게 이어져왔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전율을 안겼다.      


20150907 우리집에서 바라다보이는 북한산 향로봉


더 알고 싶고, 알게 된 것을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 기자본능이랄까, 내가 누린 것들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픈 마음을 ‘브런치’를 통해 나누고자 한다. 사실 프로페셔널로 오래 일해 오면서 독자들에게는 완결된 형식의 글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다른 글쓰기들에도 매여 있는 몸이라 완성도 있는 글을 쓰려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게 됐다. 이런 부담을 덜고 사진과 미완의 글로라도 먼저 같은 감성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내가 발견하고 깨닫고 감각한 것들에 공감하는 또래들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앞서 경고할 것이 있다면, 결코 찬사 일색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글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이곳에서도 저널리스트로 단련된 나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강남/강북의 이분법 속에서 마치 한쪽이 다른 한쪽이 대안이라도 되는 양 부풀릴 생각은 전혀 없다. 나의 체험들 속에서 뾰족하고 날카로운 지적들이 섞여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게 나의 개성이다. 몇 해 전 북유럽 여행기를 연재하면서 그곳에서 경험한 것들을 솔직하게 적었다가 “꼭 기분 나빠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며 불쾌감을 댓글로 표현하는 독자들이 있어 상처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미리 말해둔다. 정보와 소감과 비판이 적절히, 잘 섞여 들어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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