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고 싶은 동네, 부암동에 와서 배운 것들
부암동. 내가 사는 동 이름을 조용히 되내여 본다. 내 평생에 내가 정말 살고 싶어서 선택한 동네는 처음이기에 부암동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이름이 참 예쁘다고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부엉이와 발음이 비슷한 까닭도 있다. X세대, 동년배라면 어린 시절 TV인형극에서 본 척척박사 부엉이 캐릭터를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인형을 좋아하는 ‘키덜트’인 나는 당연히 부엉이 인형도 몇 개 가지고 있다. 지혜의 상징이라는 것도 좋고, 나처럼 야행성이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북촌에 부엉이 박물관 겸 카페가 있다는데 아직도 못 가본 것이 아쉽다)
부암동은 창의문 바로 밖의 성곽마을이다. 창의문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지만 자하문이라는 속칭이 더 아름답다. 보랏빛 노을이라는 ‘자하(紫霞)’는 신선이 사는 궁전을 뜻한다는데, 창의문 안쪽의 청운동에 있던 자핫골(자하동)에서 나온 이름이란다. 워낙 고운 명칭이라 지금도 동네 곳곳의 상가가 이 이름을 땄다. 자하주택, 자하문빌라, 자하빌리지 처럼 빌라단지들도 앞다퉈 이 칭호를 선호한다. 건설사 이름을 딴 아파트단지에만 살다 보니 오랜 유래를 지닌 옛 명소나 동네 이름을 따른 건물을 보면 신기하다. 강북에 와서 나는 건물 이름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동네의 역사를 가늠해보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리마(利馬)빌딩’은 두음법칙이 적용되며 ‘이마빌딩’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말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조선 개국의 주역 정도전의 집터로 마구간터가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말 등을 맡아보는 관청 ‘사복시’가 됐고 일제강점기에는 기마경찰대가 들어섰다고 한다. 사업이 잘되는 명당으로 유명해 서울시에서 가장 임대료가 비싼 곳 중 하나라 들었다. 태평로 인근의 퍼시픽타워만 해도 조선 전기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태평관이 있던 자리다. 2001년 서울시에서 세워놓은 표지석으로도 확인된다. 태평양을 퍼시픽오션이라고 하듯, 영어식으로 풀어 빌딩 이름을 붙인 듯하다.
부암동은 부침바위가 만든 이름이다. 부암경로당 앞에는 ‘부침바위 터’ 표지석이 있다. ‘부침바위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던 바위다. 약 2m 높이의 이 바위 표면에는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자국이 있었는데, 여기에 돌을 대고 비벼서 돌이 붙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화가 전해온다’고 새겨져 있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1970년 도로확장공사로 바위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여인들이 바위에 돌을 붙여놓고 정성스럽게 절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그 바위가 몹시 궁금했다. 지난해 한양도성박물관에 열린 ‘창의문과 사람들 전’에서 이 부침바위의 사진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일제강점기에 찍힌 흑백사진에는 곰보자국 나듯 오목오목하게 패인 자국이 뚜렷했다.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수대로 문지르다가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붙으면 아들은 낳는다고 했단다. 이 전설은 고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중엽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 많은 장정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는데 그중 신혼 초야를 지낸 신랑도 있었다고 한다. 신부가 매일 소복을 하고 부침바위에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빌었고 이를 들은 왕이 원 조정에 알려 신랑이 돌아오게 됐다고 전해진다. 부부가 상봉한 후에는 전에는 떨어지던 돌이 붙어있게 되면서 여기서 소원을 비는 이들이 생겨나게 됐단다.
보전과 개발이라는 상반된 가치 충돌은 영원한 숙제다. 어느 쪽을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를 딱 잘라 가를 수는 없다. 옛것을 무조건 고집하자는 건 아니지만 역사성을 훼손하며 우리 주변의 정서적 환경이 사라지는 것에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사대문 안 고도제한이 완화되면서 광화문 일대의 스카이라인이 바뀌었고, 외국계 호텔과 기업 등이 들어오면서 구도심에 새삼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도시환경정비라는 미명 하에 우리는 피맛골을 잃었다. 내근할 때 선배들을 따라 가본,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이면 도로변의 오래된 음식점은 서구화된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고,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 곳이 사라지자 뒤늦게 나는 이곳이 그리워졌다. 골목에 화로를 놓고 고등어를 구워내던 작은 생선구이집들은 사라지고 청진옥과 같이 제법 큰 음식점들은 새로 개장한 초고층빌딩에 입점했지만 옛날과 같은 맛은 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나는 피맛골이 사라진 후에야 피맛골의 뜻과 유래를 알았다. 조선시대 말 탄 고관들이 종로를 지나다닐 때마다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던 평민들이 이를 피해 다니던 길이란 뜻의 ‘피마(避馬)’에서 왔단다. 논란이 일자 수복하겠다는데, 그것이 수백 년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거리와 같을 수 있을까. 한쪽에서는 한양도성을 복원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겠다고 호들갑인데, 다른 쪽에서는 있는 것도 없애고 있다. 서울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슬로건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도 있을까 싶다.
‘토건과잉국가’ 대한민국은 허구한 날 공사판이다. 지금도 종로구 무악동 옥바라지골목 강제철거로 시끄럽다. 길 건너 옛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가 생긴 이래 1920년대 말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여관골목으로 독립운동가와 민주열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한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와 ‘엄마의 말뚝 1’의 배경이 된 현저동 46번지가 이곳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맞물려있는지라 범죄소굴화되가는 외진 골목을 벗어나자는 일부 주민들의 주장도 도외시할 수 없다. 하지만 소비에트연방식의 멋대가리 없는 시멘트 아파트에 질려 여기까지 피신 온 내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이곳도 똑같은 회색빛 풍경이 된다는 것은 심히 속상한 일이다. 경희궁 일대도 대형건설사의 모양 없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도 미관상 마음에 안 드는데,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아파트 건설현장을 보고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안산의 푸른 정기가 일괄적 콘크리트 대형 상자갑에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발표된 것이 1976년경인데 4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퇴거당하는 도시빈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놀랍게도 이곳이 ‘난쏘공’에 나오는 행복동의 실제배경이라고 한다. (옥바라지골목보존대책위원회가 김연수의 논문 ‘문학공간 현저동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인용해 밝혔다)
건축에 문외한이 내가 봐도 이 골목에는 재미난 건물들이 많았다. 구본장여관 맞은편 한 2층 벽돌건물은 상층을 도로보다 튀어나오게 지어 조금이라도 더 실내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위한 꼼수를 부렸다. 이 꼬불꼬불한 골목들은 수백 년째 이어져온 유럽의 오랜 집들이 모인 올드타운을 연상시켰다. 노르웨이 베르겐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브뤼겐 지구에서도 이런 형태의 확장공사가 이뤄진 목조가옥들을 볼 수 있다. 사람의 궁리란 동서고금 비슷하다. 천년 가까운 역사의 자취가 아로새겨진 이 낡은 건물들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입주해 볼거리를 더한다. 이곳도 화재 후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하나 옛사람들의 숨결이 전해지는 이 좁은 골목을 돌아다니는 쾌감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미 피맛골이 사라진 것을 본 뒤라 옥바라지골목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내 심정은 참담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목을 매면서 정작 가치 있는 것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식함’에 속이 쓰려왔다. 우리 세대는 이제 보다 고차원적인 가치를 추구해야하지 않나 싶었는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증에 사로잡힌 것처럼 개발 본위다. 이 사업에서 정작 가장 배를 불리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나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유서 깊은 동네에 살고 싶었다. 척박한 우리 교육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나는 경제개발의 수혜를 고스란히 받은 첫 세대인 70년대 초반생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천민자본주의의 영향 하에 있던 세대다. ‘오렌지족’은 못돼도 ‘낑깡족’ 흉내라도 내며 압구정동에 가서 놀아야 했고, ‘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부동산 가격으로만 결정되는 물질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이상의 가치’라는 말에 막연히 끌렸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소비문화의 중심지 강남 한복판에서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88서울올림픽과 맞물려 해외여행자율화, 고졸이상 해외유학자율화 시대가 열리면서 서구중심 교육을 받은 우리는 미국과 유럽 풍조에 더욱 경도됐다. 보는 눈이 넓어질수록 한국적인 것은 부족해 보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험난한 역사를 거치며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제한적인 것이 전부인 양 보고 배우다 보니 모든 것이 빈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규교육을 받은 70~80년대는 산업화 이후 과거와의 단절이 커진 시대다. 고향을 떠난 이들이 많다 보니 선대와의 연대가 끊어졌다. 개화기를 거치며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게 된 것 까진 그렇다 쳐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혼 말살정책으로 우리 것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을 거치고 6.25동란이 일어나며 전 국토가 초토화되다시피 하니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도 파괴되고 분실되고 해외 유출된 것이 부지기수다. 최빈국이 된 우리는 그저 먹고사는 것에만 매달리게 됐고 문화고, 역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모두 사치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개발이 최우선이 되는 시대가 되며 낡고 오래된 것들은 무조건 타파해야 할 후진 것들로 치부됐다.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효율적으로 교육한다는 목적하에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 주가 되며 입시에 나오지 않는 것들은 배울 여지가 없어졌다. 이러한 사회풍조 속에서 자란 우리의 사고 수준은 굉장히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제청산을 위해 친일인사들을 폄하할 수밖에 없고, 반공을 국시로 하다 보니 북으로 넘어간 수많은 지식층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검열시대에 표현과 예술의 자유도 철저히 억압됐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배운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빈곤하게만 생각됐다.
주한미군방송(AFKN)이 지상파 2번 채널로 방송되던 시대였고, 가뜩이나 서구화 교육을 받은데다가 88올림픽 이후로 서양문물의 직격탄을 맞은 우리 세대는 더욱더 우리 고유의 것과 멀어졌다. 대학생들 사이에 유럽 배낭여행 붐이 불면서 오랜 역사적 향취가 가득한 유럽 도시들에 매혹된 후에는 외국에 나가 살고 싶어 하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녀라는 이가 미니홈피에 “정말 또 느낀다. 우리나라가 제일 구리다. 프랑스에 있는 루이뷔통 건물이란다. 정말 너무 멋있지”라는 글을 써서 욕을 얻어먹은 적이 있는데, 아마 많은 젊은 세대들이 이러한 시각을 가졌을 것이다. 나 또한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까이 있는 것은 발견하지 못한 채 우리나라의 척박한 문화적 환경이 답답하기만 했다. 3.8선이 그어진 이후로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이 막히면서 섬나라보다 더 폐쇄적인 된 지정학적 위치도 한몫했을 것이다. 시야가 좁아지다 보니 대륙으로, 해외로 진출한 불과 한 세대 위 인물들의 업적도 잊혀지게 됐다.
한편으로 외유 경험은 우리 것을 재발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각을 국내 돌리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다시금 보이게 됐다. 시골이나 산골로 가지 않아도 자연의 정서와 역사적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유럽 같은 동네가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도읍으로 정해지며 켜켜이 쌓여온 600년 고도의 숨결을 구도심에서 발견했다. 청와대가 위치하며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있던 주변 동네들이 일반시민들에게도 알음알음 핫플레이스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라고 보인다. 민주화의 영향이 크다. 그전에도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의 인터뷰에서 “도심에 이런 높은 산이 위치한 것이 신기하다”, “도심에 이런 고궁이 함께 있는 것이 경이롭다”는 내용을 보긴 했지만, 그저 항시 있는 것이라 눈여겨볼 줄 몰랐다. 그러나 유럽을 샅샅이 보고 온 후, 어린아이 같은 신선한 눈으로 관찰하는 법을 터득하고 그 스펙트럼을 국내에 적용하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비싼 비행기를 타고 물 건너 가고 보니 다시 못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관찰력이 급증한 덕분이다. 그저 스쳐 지나갔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