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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May 23. 2022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

여성공간의 상징 태화여자관 101주년

도서명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 ; 여성공간의 상징 태화여자관 101주년’ |

지은이 김태은  |  분류 역사(대학사, 여성사, 근대사), 여성 | 출판사 스타북스 |

판형  국판   면수  416쪽 | 발행일 2022년 5월 25일 | 

가격  20,000원 | ISBN 979-11-5795-645-6 03910


도서문의

스타북스 (김상철 대표) : 02) 723-1188 starbooks22@naver.com

이메일 (김태은 작가) : tekimmail@gmail.com     

태화관의 여성공간으로서의 의의를 살리고자 ‘여성교육기억투쟁연대’을 꾸릴 예정입니다.

가입, 활동 등 문의는 twsswu@naver.com로 부탁드립니다. 

카페 https://cafe.naver.com/twsswu

블로그 https://blog.naver.com/twsswu

책 소개     

올해도 격동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여러 사건들이 한 세기를 기념했다. 2019년 한민족 전반에게 ‘근대’를 깨우친 3·1운동이 100주년이 맞은 이래로, 2022년 3·1운동의 수장으로 지목됐던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순국 100주기가 도래했다. 손병희의 사위 방정환이 제정한 어린이날이 100년이 됐다. 돈암동을 배경으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 권진규를 비롯 김수환 추기경, 소설가 선우휘와 손창섭, 시인 김춘수, 건축가 김중업 등이 탄생 100년을 맞이했다. 한 세기 전 이 땅은 오늘날 삶의 모습을 탄생시킨 ‘근대’가 발화하는 혼돈과 창조의 시간이었다. 그 누구보다 세상의 절반, 여성들에게 닥친 급격한 변화는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최초’라 할 만한 일들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획득한 여성참정권은 ‘남녀동권’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일대 개혁이었고, 여학교/여학생의 등장은 여성에게 공적교육이 작용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최근 세계적 주목을 받은 애플TV+ 드라마 ‘파친코’는 이 시기 한국여성의 삶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주인공 선자의 서툰 젓가락질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개의 여성들에게는 밥상에 제대로 앉아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조차 가르치지 않는 시대였다.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겨지던 여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재탄생하며 스스로 삶을 개척하게 된 데는 여성에게 행해진 최초의 제도권 교육과 그 여파가 절대적이었다. 신간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 ; 여성공간의 상징 태화여자관 101주년’은 한 여자대학의 묻혀버린 근원을 파헤치며 한국 여성교육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훑어 내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를 통해 아카데미가 시대와 어떻게 긴밀히 조응하는 지에 대한 통찰을 병행하고 있다. 또 여대의 존치를 두고 꾸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시대, 아직 150년도 채우지 못한 여성교육 의의와 여권의 위상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부수적 효과까지 불러일으킨다.      

3·1운동 발상지 태화관에서 탄생한 태화여자관이 101주년을 맞은 2022년, 작가는 3·1운동이 한국여성의 삶과 여성사에 미친 혁명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태화관을 조명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탄생한 태화여학교가 국내 굴지의 여자대학인 성신여대로 발전한 사실을 재발굴하고, 이 장소에서 어떻게 한국여성운동의 초석이 다져졌는지를 집중적으로 추적한다. 더 나아가 개신교 첫 여성선교사가 입국한 188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여성의 공교육과 전문직업이 생긴 연원까지 헤집어내며 ‘연혁 복원’을 강력히 설파해낸다.      

‘여성사가 여성이 받아야 할 권위를 되찾아준다고 확신’했던 ‘한국 최초 민간신문사 여기자 최은희’를 기리며 시작하는 이 책은 후배 여기자가 부르는 송가이기도 하다. 최은희로 시작, 김마리아, 이각경, 이숙종, 정종명, 한윤명, 이금전, 한신광, 유영준, 서대인, 앤 월리스 서 등 희미해지거나 아예 잊힌 수많은 여성인물들을 호명하며 여권을 이끌어온 진보적 여성상의 계보를 그려낸다. 동시에 주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당대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신문보도상의 에피소드와 사진들도 꼼꼼히 펼쳐놓아 대중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단락 하나하나를 독립된 기사로 풀어내도 될 만큼 문제의식과 자료조사가 철저한 것은 기자 출신 작가가 보여주는 최장점이다. ‘태화관’의 한자표기에 대한 문제제기와 같은 것들은 지금까지의 역사연구가 얼마나 상투적이고 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역사를 역사책 속에만 가두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지는 대목들이다. 역사의 현재성을 각인시키는 방법으로서 장소성에 천착한 것도 최신 흐름에 걸 맞는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도구로서 장소의 의미를 확장시키며, 왜 태화관이 여성의 공간이 돼야하는지를 주장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며 존폐여부를 놓고 떠들썩한 여성가족부, 또 여성부가 2024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이던 국립여성사박물관의 존립 방안으로까지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책 뒤표지>     

“대한독립을 위한 첫 피는 대한여자에게서 흘렀다” - 독립신문 1920년 2월17일자     

“시내 인사동 만세사건으로 유명한 전 태화관터에 위치를 점령한 태화여자관”- 조선일보 1925년 3월30일자     

“동덕학교에 이웃한 동료의 학교가 성신여학교이다. 이 학교의 전신은 구 태화여학교이니, 창설된 지가 18개성상이라 할 수 있으며 소화11년 3월부터 현 교장 이숙종씨가 인계경영을 하게 되면서 발을 더 한층 힘있게 내어디디게 되었다” - 동아일보 1938년 5월28일자     

“조선의 자부심과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에서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품격을 높이는 장소로 거듭나게 됐다”- 엘라수 와그너 (태화여자관 3대 관장)               

여성사적 의미로 새롭게 다뤄야할 3·1운동과 태화관      

남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역사서술에 공을 들여왔다면 여성의 역사는 개별, 파편화되기 일쑤였다. 이 책은 한 여자대학의 뿌리를 찾아올라가며 이를 통해 한국여성의 근대화와 여권운동의 역사를 아우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여대는 여성의 영역에서 이뤄지던 일들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왔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계(universe, university)를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국최초의 여권선언문도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으로 시작됐을 만큼 여성교육에 대한 요구가 자생적 여성운동의 시작이었다. 항일독립운동과 궤를 같이 해온 한국여성운동은 전 민족적 혁명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여성참정권을 획득하고, 독립선언식이 이뤄진 ‘3·1운동의 발상지’ 태화관이 여성을 위한 교육·복지기관인 ‘태화여자관’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태화여자관을 배경으로 탄생, ‘여성의 지위 향상’를 노린 좌우합작 여성단체 근우회는 1930년 서울여학생만세운동을 주도한다. 한국여성들의 자발적 요구로 탄생한 태화여학교 역시 이 시위에 참여해 8명의 독립유공자가 추서된다. 1936년 여권운동가 이숙종에게 인계돼 성신여학교가 되고, 오늘날 최고학부 성신여대로 발전해 여성자신이 주축이 되는 학문적 공간을 이어오고 있다. 여성 주체성의 맥을 이어온 여대가 21세기 미투운동의 보루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3·1운동100주년, 태화관에서 기려져야했던 것은 당연히 그 핵심적 결과물인 ‘여성의 권리’였다. 서울의 중심점에서 민족성전으로, 여성운동과 여성교육의 터전으로 계승돼온 장소적 상징성이 보여주는 바는 뚜렷하다. 이중삼중으로 핍박 받던 인류의 절반이 자존을 되찾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다. ‘자유, 평등, 박애’ 같은 평화적 의미를 아우르는 구호를 담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이들은 3·1운동에서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던 한 세기 전 여학생들보다도 진화하지 못했다.      

한편 작가는 여성사와 여성주의를 결합한 글쓰기를 통해 여성에게 지워진 ‘공간의 불평등성’까지 논의를 확장시킨다. 시간의 연속성을 상기시키는 것은 ‘장소’라는 것을 웅변하듯, 현재에도 직관할 수 있는 역사의 숨결을 따라잡기 위한 서술을 이어간다. 여성들 사이의 유대와 그것이 만들어낸 연계를 통해 1886년 또 하나의 여자대학의 싹이 움터 오르고 있었음을 논증하며 아직까지는 왜 여학교/여대가 필요한지를 역설한다.  

              

저자 소개     

김태은 

언론인 출신 작가. 일간신문 국내최초 인터넷이슈팀장을 맡아 온라인 취재영역을 개척했고, 뉴스통신사에서는 문화전문기자로 일했다. ‘김에리’라는 필명으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며 TV 미디어비평 프로그램 등에 출연했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등의 책을 출간했다.      


차례     

[들어가며배제된 3·1운동의 여성사적 의미          

1여자대학이 된 민족성지 태화관      

 01. 고증 부족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02. 여성해방 상징하는 3·1운동 공간

 03. 3·1정신 이어받아 탄생한 성신여대

 04. 확장되는 역사, 보이지 않는 전쟁터           

2. 3·1독립정신의 장소성 계승한 적자     

 01. 선구여성의 일터, 여성운동의 요람 

 02. 한양 중심석 있던 북촌의 갑제

 03. 3·1독립선언식 전후의 태화정

 04. 3.1정신 간직한 천도교 중앙총부           

3서울여학생운동으로 발화한 성평등교육     

 01. 각성한 여학생들의 자발적 향학열

 02. 양성평등 여성교육·여권신장에 솔선

 03. 태화여학교생 8명, 독립운동가 서훈

 04. 태화 승계 성신의 혁신·여성연대           

4여성계에 기여한 태화·성신의 인물들     

 01. 한국 땅에 헌신한 여성 선교사들 

 02. 가정법 개정 앞장선 여권운동가 이숙종 

 03. ‘여권통문’ 발굴, 박용옥 성신여대 교수 

 04. 북유럽 설립 국립의료원 간호대 승계 

      

[나오면서한 세기라는 시간그리고 한 개인의 염원     

          

본문 중에서      

필자의 전작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에서도 지적했듯이 집권당의 완고하고 견고한 ‘내로남불’ 권력욕에 균열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에 의한 ‘미투혁명’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힘을 잊고 있던 자칭 진보·좌파의 여성혐오는 곳곳에 드러났고, 결국 민심조차 떠나게 하는 원흉이 됐다. 태화관의 역사적 추이만 잘 살펴봐도 새롭게 ‘여성’이라는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지점은 많았다. 2010년대 들어 꾸준히 재발견되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여성사적 흐름에만도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3·1운동100주년은 아주 새로운 계기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586세대의 청개구리식 방식에만 집중한 상상력의 한계는 일제잔재의 부활이라는 기괴한 기념행사를 만들어냈다. 지난 잔재의 철거도 당대 의식 속에서 국민적 합의를 거쳐 진행된 것인데 파괴와 재현을 반복하며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통합된 대한민국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진영논리에 갇힌 사고다. (p51~52)     

3·1운동이 가져온 가장 가시적 변화도 ‘여성’이라는 존재의 대두였다. … 여러 보도매체들에 남아있는 근대사의 증언만 봐도 역사가들에게 여성과 여성사가 얼마나 소외당하는지를 알 수 있다. 수개월간 지속된 만세운동 가운데 여성들에 의해 조직되고 주도된 평화적 행진이 많았고, 임시정부에서 여성참정권을 얻는 계기가 되지만 이에 대한 기억은 너무 쉽게 사라져버렸다. 임시정부의 적통을 계승하겠다면 한국여성의 활약상과 참정권 쟁취에 관한 부분을 반드시 한 몫으로 다뤄야할 것이다. 여성의 광범위한 독립운동은 임시정부의 여성정책에 큰 영향을 미쳐 남녀평등 방침이 제도화됐고, 여성과 여성운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p58~59)     

‘남녀’가 아닌 여자를 앞에 둬 ‘여남’이라고 부른 것은 21세기 들어 탄생한 영영페미니스트(뉴페미)가 최초가 아니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1945년 조선부녀총동맹(총재 유영준, 부총재 정칠성·허하백)은 “봉건유제 타파해서 여남평등 이룩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글로 남아있는 당대 여성운동가들의 주장은 여기서 일일이 다 거론하진 않겠지만,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관념 변화를 통한 남녀평등, 성과 정조의 분리 주장 등 현시대에도 진보적이라 할 만한 것들이다. 이들이 선택한 단발머리는 21세기 ‘페미니스트 숏컷 논란’처럼 여성억압에 대한 저항의 일환이었다. 여성해방론, 정조취미론, 자유연애론 등을 주장한 글을 발표해 파란을 일으켰던 나혜석은 한국최초로 ‘부모성함께쓰기’를 시도한 페미니스트라 하겠다. 1990년대 호주제에 반대한 여성운동가들이 양성쓰기를 실천하며 네 자 이름은 이 시기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표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 후 낳은 첫딸의 이름을 김나열이라고 짓는데,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悅)’이라는 뜻으로 붙였다. (p76~77)     

태화여자관은 교파와 이념, 정파를 떠나 ‘여성’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합동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열린 공간이었다. 그밖에도 당대 신문을 살펴보면 조선여자청년회, 경성여자청년회, 망월구락부, 직업부인협회, 가정부인협회, 경성여자소비조합 등 다양한 조직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고, 연합영아보건회, 연합아동보건회 등도 사무소를 뒀다. 극예술연구회의 공연, 조선음악가협회 ‘음악과 강연의 밤’, 각종 간담회와 각급 행사가 열리는 등 문화예술단체들도 이곳에 사무소를 두고 판을 깔았다. 그 시대 사회문화의 요지라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이숙종도 태화여학교를 인수하기 직전 이곳에서 열린 직업부인협회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당선됐다. 미국인 선교사가 꾸리는 장소로, 성조기를 꽂아 요릿집을 내몬 에피소드는 일종의 치외법권지대로 작용하며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도 의미한다. 근우회가 독립적인 회관을 마련한 후 일경의 지속적인 감시를 당했다는 것은 당시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조선공산당사건, 서울여학생만세운동 등에 연루된 바도 크다. (p144~145)     

동아일보 1920년 9월22일자는 사회면 전면을 터서 ‘독립선언사건의 공소공판 일사천리로 심문진행’을 보도하며 부제에 ‘명월관 선언식’이라는 표현을 쓴다. 심문 중 ‘명월관지점 태화정’이라는 지칭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한자를 太華亭이라며 처음 지어졌던 표기를 따르고 있다. 매일신보의 ‘태화여관’, ‘태화요리점’ 등도 여전히 ‘太華’라는 한자표기를 지속했다. 현재 모든 매체에서 3·1독립선언식이 이뤄진 太華館을 泰和館이라고 쓰고 있으나, 한글전용시대라 음이 같으니 이를 두고 따지는 이는 없는 것 같다. 3·1독립선언식이 이뤄진 역사적 장소를 지칭할 때는 그 시기 쓰이던 太華館이라고 씀이 옳지 않을까. 하지만 太華의 출처가 중국고전시선이고, 華가 중국, 중국어를 가리키는 글자로 많이 쓰이니 굳이 ‘독립’ 관련 장소에 쓰는 것은 저어되기도 한다. 태화여자관이 지속적으로 ‘태화관’으로 불리다보니 이후 泰和館이라고 굳어져 100년 넘게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泰和’라는 한자표기는 태화여자관을 설립한 초대관장 마이어스가 정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태화복지재단 측은 하나님의 ‘큰 평화(泰和)’를 뜻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안순환이 개명한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많은데, 마이어스 취임시 바뀐 것은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알 수 있다. 1921년 2월27일자에 ‘明月館支店이 太華女子舘으로’라고 썼다가 한 달 뒤 3월25일 마이어스 인터뷰기사에서 ‘泰和女子舘’이라고 바꾸어 표기했다.(p197~198)     

성신의 역사는 학교, 이어서 대학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공력이 투입됐던가를 기꺼이 느끼게 한다. 천도교 인사 권동진, 이종린 등의 주선으로 성신이 태동한 것은 독립정신과 교육구국사상의 자장 안에 있었다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3·1운동 직후 자주독립과 여성계몽을 위한 우리민족의 열망이 낳은 결정체인 태화여학교의 의의를 거듭한 여성교육기관인 것이다. 또 남녀차별이 없는 천도교를 자생적 한국여성운동의 원천으로 보거나, 성평등의 내재적 원류로 동학을 꼽기도 하는데 이러한 영향 또한 성신의 자양분이 됐다.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는 1981년 ‘동학의 남녀평등사상’이라는 논문을 시작으로 이를 분석한 선구적 연구를 펼쳤다. (p218~219)     

성신의 전신 태화여학교가 한국 근현대교육사에서 가장 독특한 점을 꼽으라면 한국여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교육기관이라는 사실이다. 보통 정규학교는 창립자의 선구적 뜻에 의해 설립되고 학생을 모집해 운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 수순이다. 국·공립 외에는 설립자로 모셔지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의 동상 등을 세워 기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 여학교들도 선교사에 의해서나 여성교육에 뜻을 가진 선각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태화여학교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한국여성들의 요청으로 시작된 매우 이례적 학교다. … 민중, 그것도 이름 없는 여인들이 주체가 돼 학교설립을 요청해 이뤄냈고, 그 학교가 현재 국내 유수 4년제 종합여자대학교로 발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유례없는 하나의 기적이다. … 3·1운동이라는 민중이 일으킨 혁명의 파장과 그 발원지 태화관의 장소적 힘이 오랜 기간 규방이나 부엌, 집안일에 묶여있던 여성들을 자극해 만들어낸 혁신이자, 배움의 때를 놓쳤지만 이를 보충해 뒤처지지 않고 살아보겠다는 갈급한 욕구가 만들어낸 이변이다. 영웅사관에 대치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민중론’이 제기됐지만, 이중 여성의 몫을 제대로 평가하는 여성사적 시각이 얼마나 고려됐는지는 의문이다. 식민지 압제와 전근대적 여성의 처지라는 이중의 압박을 받고 있는 조선여성들이 깨어나 이룩한 대사건으로 반드시 재평가 받아야할 것이다. 같은 시기 어느 나라에서도 여성의 반식민지 투쟁이 이처럼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은 없었다. 이는 여성해방 물결로 이어졌는데, 당대 상황을 보자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p239~240)     

1930년 1월 ‘서울여학생만세운동’(허정숙사건, 근우회사건)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부수적 여파 정도로 여겨지곤 했으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심도 깊게 진행되며 3·1운동의 연장 상에서 언급됐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사건’(김마리아사건)과 함께 여성이 온전한 주체가 된 독립운동으로 그 의미가 승격됐다. 국가보훈처가 직권발굴한 여성독립운동가들 중 태화여학교에서는 서울여학생만세운동에 참여한 김동희(1900~?), 김상녀(1912~?), 남윤희(1912~?), 노보배(1910~?), 민임순(1913~?), 신준관(1913~?), 정태이(1902~?), 홍금자(1912~?) 등 8명이 서훈됐다. 이들은 1930년 1월15일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참여하다 체포돼 20일 구류형을 받은 것이 확인돼, 모두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태화여자관이 한국 근대사 격동의 한가운데서 서울을, 또 한반도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주인이 바뀌는 고난을 고스란히 겪느라 학생들에 대한 자료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 태화여학교에서는 위에 언급한 서훈자 8명 포함 총 9명이 ‘구류20일’의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18세의 ‘서중랑’(본적 내자동 128)은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 (p277~278)     

미군정하 혼란기 성신여자중학교(지금의 중·고교)에서 있었던, 성폭력을 가한 남교사에 대한 재학생들의 대처는 현시대 여학교들에서 일었던 ‘스쿨미투’ 못지않다. 전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성신여학교 임천수 사건’은 문교부장관과 서울시장까지 나서 마무리 됐다. 1947년 3월 성신여중 음악교사 임천수는 한불천(18·가명) 등 제자 여러 명을 농락해 성북경찰서에 유치됐는데 학교 측의 신원보증서가 제출되면서 석방된다. 이에 전교생 700여명이 학생회를 개최해 공개적으로 ‘미투’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 해 경향신문 3월18일자는 ‘학생회서 진상규명 교장은 보증취소요구’ 제하로 학생회를 열어 해결책을 토의 중 “나도 임천수에게 희롱을 당했다”고 손을 들어 고백한 여학생이 여러 명 있었음을 알린다. 기사에 따르면 먼저 4명이 먼저 나섰고, 손을 들지 않은 학생 1명이 추가 지목을 당하는 등 총 9명이 피해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엄격한 정조관념 속에서도 당시 여학생들이 적극 나서 자발적으로 자생적인 ‘미투’를 벌였다는 점이 경이롭다. 이들은 임천수가 학교와 학생들에게 불명예스러운 누를 입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임천수를 감싸고돌던 이숙종의 변화까지 이끌어내는데, 학생주도적이고 주체적인 교풍이 내내 이어지고 있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p317~318)      

여느 여성의 역사들처럼 허물어졌다가 재생되기를 반복하는 동안, 국내 여성운동의 수많은 업적들이 흩어져버렸다. 개화기에 구국운동, 여성교육운동 등으로 움튼 국내 여성운동은 1919년 3·1운동을 맞아 대중화됐다가 전시체제에 들어간 일제의 억압으로 움츠러든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후 국가재건을 하던 1950년대 다시금 여성의 권리를 찾으려는 선각자들이 노력이 있었고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가 발족하게 되지만 여권운동보다는 여성단체들을 대표하는 모임정도로 점차 보수화됐다. 1970년대 전후 유신시대 여성운동은 독재정권을 지지하거나, 독재정권에 대항한 사회민주화운동에 통합돼 여성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침체됐다. 이숙종, 최은희 등의 1세대의 활동으로 간신히 맥을 이어오던 한국 여권운동이 다시금 굵직한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꽃피며 진보적 여성운동가들의 모임이 형성되면서 부터다. 1986년 부천서성고문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이 창립되고, 1988년 여성신문도 창간되며 페미니즘의 기치가 다시금 우리사회 전면에 등장했다. 199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영페미니스트가 나타났지만 2000년 이후 정부주도의 ‘국가페미니즘’이 제도화되며 활력을 잃게 된다. 2005년 반세기동안 여성계가 주장해온 호주제폐지까지 이뤄지며 투쟁해오던 많은 차별법이 개선되고, 다수 운동가들이 국가직으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2015년 이후 영영페미니스트 세대가 등장하고 미투운동이 촉발되기까지 페미니즘은 한동안 잊힌 이슈이기도 했다. 여권운동이 부침을 오가면서 한세대 단위인 30여년마다 과거를 잃어버린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해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속적으로 여성운동의 업적이 쌓이고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훼방하는 요소다. (p347~348)     

성신의 내력을 찾아올라가며 오랜 여학교간의 자매애를 발견하고 여성의 역사를 회복하는 동시에, 한국여성들의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여권운동의 맥이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태화여학교를 천도교의 도움으로 개교한 성신여학교가 인계하면서, 근대사립학교의 주요 뿌리인 기독교계 미션스쿨과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민족사학의 전통을 모두 이어받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3·1운동의 양대 주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와 천도교의 영향을 당대에 모두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민족정신의 교두보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유연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융합학문시대에 걸맞은 협동적이고 통합적인 학풍을 가지게 됐다. ‘여성’이 주체가 된 교풍은 여성중점의 교육과 여성시각의 연구를 지속가능하게 한 요체였다. 직업학교 역할로 점점 전락해가는 대학에서 학생들은 점점 보수화되며 대학이 가져야할 신선한 혁신의 정신이 사라져가고 있다. 오직 여대들만이 ‘미투운동’으로 변혁의 중심이 섰다는 것은 3·1운동과 서울여학생만세운동의 기개를 떠올리게 하는, 여성주도의 진보성과 선진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젊은 여성들이 모여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여자대학의 존재 이유는 뚜렷하다. (p41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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