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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May 12. 2016

북유럽, 낯선 공간감에 빠지다

각각의 자연 빛을 지닌 스칸디나비아 지역 5곳

  

             

내 생애 가장 긴 여행의 목적지를 북유럽으로 정한 것은 ‘지상낙원’ 그들의 삶의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직접 가보면 예상 밖의 경험을 안겨주는 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던가. 핀란드 헬싱키에서 시작해 대중교통으로만 북으로 향해 유럽 최북단이라는 노르웨이 노르카프에서 정점을 찍고 다시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 한 달을 내려온 후, 덴마크를 거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귀국하는 3개월간의 여정을 미리 짠 일정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쳤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남녀평등이 가장 잘 구현된 나라들로 유명하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이쪽으로 이민 가는 것을 꿈꾸는 이들이 꽤 있다는데 막상 한국인이 가보면 한민족 기질로는 적응하기 힘든 면들이 꽤 있다. ‘그들만의 천국’이 아닌가 싶은 소외감은 각오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수줍음도 있고 개방적인 편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이나 고향 친구가 아닌 이상 쉽게 어울리기 쉽지 않다. 한 노르웨이인은 “우리는 저녁식사에 외지인을 초대하는 관습이 없다”고 했다. 영국 같은 곳에서처럼 남성들의 신사도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성범죄 관련 법규가 엄격하기 때문인지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자에게 오해받을 수 있는 행동은 안 한다. 반면 여성들이 힘도 더 잘 쓰고 적극적으로 느껴진다.    

  

헬싱키 풍경

외진 곳으로 갈수록 인구밀도는 떨어지고, 여행이 길어지자 깊은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 고독감을 메워준 것은 글자 그대로 ‘천혜의 자연환경’이었다. 그저 ‘아름답다’는 단순한 표현으로 마감할 수 없는 완전히 색다른 공간감이었다. 여행안내서의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는 감각 차원의 확장이다. 보통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는 클리셰를 쓰는데, 그 진부한 표현이 사실로 변모한다. 굳이 부언하자면 3차원 CG로 만든 비현실적 공간을 경험하는 듯한 쾌감을 안겨준다랄까.       


남는 것 사진뿐이라더니.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설렘과 흥분이 뭉클하게 다시 떠오른다. 비록 카메라가 그 순간의 오묘한 색채와 분위기를 모두 담을 수는 없을지라도 도화선이 돼주어, 내 안에 잠겨있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세차게 솟아오른다. 잠자고 있던 뇌 부위를 깨우기라도 하듯 오감을 신선하게 자극하며 마음속 깊이 새겨진 그 체감을 다시 불러내 본다.        

   

헬싱키 대성당 앞에서 바라본 하늘, 깃털구름

#1. 처음 가본 고위도, 처음 맛본 백야-헬싱키

이렇게 고위도까지 올라와본 것은 처음이다. 하지가 가까워질 무렵이라 백야현상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북극권에서는 여름철 일몰과 일출 사이에도 희미하게 밝은 상태가 지속된다. 조금 아래쪽의 헬싱키에서도 밤 11시는 돼야 어둑해진다. 저녁 무렵 반타공항에 내리는데 여전히 훤하다. 쭉쭉 뻗은 자작나무가 빽빽한 숲이 공항을 둘러싸고 있다. 공기가 주는 청량감도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것이다. 북유럽 입문 도시 헬싱키에서의 느낀 낯선 공간이 준 감동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데 태양을 지평선 가까이에서도 질 줄을 모른다. 운동장에서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조명 없이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그들의 맑은 함성과 웃음소리가 티 없이 투명한 공기 속으로 울려 퍼진다. 북유럽 체류가 길어지며 햇빛에 대한 감각은 점점 익숙해졌다. 아쉽게도. 그러기에 첫경험은 더욱 강렬했다.    

  

다음날, 해변의 마켓광장(Kauppatori)으로 아침을 사 먹으러 가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도시 귀퉁이의 공원 지대에 들어섰는데 천상과 지상의 경계를 그린 영화 ‘러블리 본즈’ 속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 몽환적 풍경이 펼쳐진다. 어제저녁 거대한 숲의 빛깔이 반사되기라도 한 듯 청록의 하늘은 어느새 코발트블루로 선명하게 빛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빛은 이전까지 경험해본 적이 없는 높이와 다채로운 색감을 드러낸다. 가슴이 두근거려온다. 고위도에서는 태양빛이 대기에 입사하는 각도가 더 낮고 공기 밀도도 더 높다. 이 때문에 고위도 지역의 하늘에서는 저위도 지방보다 빛의 산란이 더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찬란한 해가 더더욱 낮고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맑은 대기는 태양을 더욱 크고 빛나게 보이게 한다.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공기, 갓 깎은 잔디의 싱그러운 풀냄새, 꽃과 나무들이 그득한 언덕은 지금껏 내가 발을 디디고 있던 지상에서 느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감각을 제시한다. 순간 우습게도 난 ‘천국에 와있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착각을 거들었다.      


발트해 연안에서 하비스 아만다(HavisAmanda) 인어상 분수를 바라보며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간단한 아침을 하고, 헬싱키 대성당으로 향했다. 내가 더 감탄한 것은 둥근 지붕 위로 펼쳐진 하늘이다.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물빛으로 물든 하늘은 거대한 캔버스 같다. 화가가 경쾌한 붓질로 흰색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 보이는 깃털 구름들은 아무리 바라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다. 내 눈에까지 파란빛이 스며드는 것 같다.           


로바니에미에서 라누아로 가는 길, 차안에서 보는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2. 산타마을보다 하늘과 호수-로바니에미

밤기차를 타고 핀란드 북쪽으로 향했다. 침대칸에서 자다 깨다 창밖을 내다보니 훤한 백야 중에 빽빽한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진다. ‘공식’ 산타마을을 자처하는 로바니에미에 가려는 것이다. 막상 가보니 이젠 완전히 관광산업화되어버린 산타마을보다는 핀란드의 자연을 본격 체험한다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로바니에미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라누아로 가는 길이 더 인상적이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더욱 쨍쨍해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시려올 정도다. 두둥실 낮게 떠있는 뭉게구름의 양감이 손에 잡힐 듯하다. 태양은 얼마나 크고, 햇빛은 어찌나 찬란한지. 날아갈 듯한 구름 아래로는 양쪽으로 뾰족뾰족한 전나무 군락지가 펼쳐지는데 각각의 채도차와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전경에 가는 길이 지루할 줄을 모른다. 차는 막힘없이 길 위를 달리는데 주행연습 CG화면이라도 마주하는 듯 초현실적이다.      

핀란드가 ‘호수의 나라’라는 것을 여기서 실감한다. 핀란드어 국명 ‘수오미’가 바로 이 뜻이다. 전국에 크고 작은 호수가 6만 개나 된다는데, 곳곳에서 동그란 호수를 발견할 수 있다. 잔잔한 물 위에 거울처럼 비치는 하늘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늘빛을 고스란히 반사한 호수는 또 하나의 작은 하늘이 된다.      


이런 자연친화적인 환경에서 동물을 가둬놓는 동물원이라니 너무 인간본위 아닌가 했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동물원과 달리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펜스와 그물을 치고 조성한 야생공원이라고 한다. 관람도 2.5㎞에 이르는 나무로 만든 트레일을 따라 트레킹을 하듯 이뤄진다. 숲 속에 숨어있거나 멀리 떨어진 공간에 있는 동물들을 숨은그림찾기처럼 관람해야 한다는 점이 차별점이다.      


함메르페스트 톤호텔에서 내다 본 바다 풍경. 관광객을 싣고 온 후티루텐이 정박해있다

#3. 푸르른 유토피아-함메르페스트

유럽 대륙 최북단이라는 노르카프에서 행정이 미치는 최북단 도시라는 함메르페스트로 향한다. 남쪽로 내려가면서 자연빛의 변화가 확연하다. 툰드라 지대에는 키 높은 식물이 없다. 황록빛으로 펼쳐지는 대지와 짙은 회색빛의 기암괴석들이 신비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바다 빛깔도 회색이다. 옅은 회색이다가 검은빛이 날 정도로 진해지기도 한다. 차창 밖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미묘한 변화의 차이를 즐기느라 긴 버스여행이 지루하지 않다. 함메르페스트가 가까워질수록 물빛은 군청색이 된다. 하늘도 바다색을 닮아 남색으로 짙어진다. 인상적인 것은 목조건물들도 이 하늘빛, 바다빛을 따라 파란색이 주조라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일생에 한 번은 함메르페스트에 갈 수 있지.” 나를 함메르페스트로 이끈 건 이 한 구절이다. 핀란드 작가 마르야레나 램브케(MarjaleenaLembcke)의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의 마지막 구절이다. 소설 속에서 함메르페스트는 이상향이다. 독성물질이 그득한 공장에서 뼈를 깎는 중노동에 시달리며 결국 마흔 후반대에 돌아가신 레나의 할아버지는 함메르페스트를 지상낙원이라고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여행객은 노르웨이 해안선을 따라 도는 크루즈 ‘후티루텐’이 정박할 때 잠시 둘러보고 떠난다. 나는 이 조용한 ‘청색의 도시’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청회색부터 짙은 블루, 생생한 파란색까지 톤을 달리하는 청색의 하모니가 도시의 이미지를 청량하게 만든다. 푸른 눈의 인종이라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푸른색 옷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지만 자동차,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도 파란색, 플라스틱 대야도 진푸른색, 안전 철제보호대나 공사용 가림막, 컨테이너, 기중기 같은 중장비에도 파란색이 빠지질 않는다.      

이 도시의 매력에 취해갈 무렵 어린 딸과 검둥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한 사내를 만났다. 푸르른 도시를 칭찬하자 그는 “1년 중 반이 밤만 지속되는 거 아니? 최근까지도 계속 흐리고 비가 왔어. 어제부터 겨우 이렇게 태양이 보이는 거야” 한다. 그제야 그들이 푸른빛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시 곳곳을 청색으로 칠해놓고, 여름 한 때 반짝, 이 푸른빛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때마침 청명한 날씨로 즐길 수 있었던 이 도시의 푸르름도 내 마음 한편에 그리움으로 남았다.           


브릭스달 빙하로 가는 초입에 있는 올덴 마을의 신비한 빛깔

#4. 빙하보다 아름다운 연초록 마을-올덴      


노르웨이 관광의 꽃, 피오르드를 따라 내려오며 아름다운 풍경은 질리도록 봤다. 언제나 그렇듯 첫인상이 가장 감동적이다가 아쉽게도, 점점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레우마 산악철도를 타고 본격적으로 피오르드 지대로 들어가는데 달력 사진에나 봤을 법한 절경들이 눈앞에 마구 쏟아진다. 신선이 노닐만한 폭포 계곡들을 지나 온달스네스 역에 내렸다. 숙소조차 하룻밤 묵고 떠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목가적이면서도 낭만적이다. 지붕에 풀을 키운 시골 농가 스타일인데 깔끔하고 예쁘다. 루프튼제도를 비롯 골든루트와 브릭스달 빙하 등 명소를 죄다 거쳤지만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곳은 브릭스달 빙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올덴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윌리엄 헨리 싱어라는 미국의 백만장자이자 화가의 집이 명소로 소개돼있다. 그의 많은 그림들은 올덴과 그 주변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을 선택한 그 거부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이곳의 색을 그림으로 담아보고 싶다는 내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햇빛마저 어떻게 이런 색이 날까, 노란색 셀로판지를 통해 보듯 세상이 온통 노랑과 연초록의 변주로 보이는 오묘한 색감의 풍경이다. 치자꽃으로 물들이면 나오면 노오란 색이 공기에까지 스며든 것 같다. 높은 산 위로는 진녹(津綠)의 숲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인가 쪽으로 내려올수록 초록빛, 누런빛의 초원과 밭이 조각보를 세련되게 이어놓은 듯하다. 노란 햇빛을 머금은 호수는 신비한 청록빛을 낸다. 붉은 지붕을 한 집들의 벽은 하나같이 이 자연색과의 조화를 위해 노란색, 초록색, 미색 등으로 칠해 놨다. 흰 들꽃, 진홍빛 보랏빛 방울꽃들이 펼쳐진 들판 너머로 짙은 갈색과 검은색 소들이 우물우물 풀을 뜯고 있다. 이보다 더한 명화 감상이 있을 수 있을까, 나 자신이 그림 속 인물이 된 것만 같다. 예술적 감수성을 채우고픈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곳이다.


          

스카겐에서 북해와 발틱해가 만나는 그레넨으로 가는 도중

#5. 스카겐화파를 탄생시킨 자연-스카겐     

항구도시 프레데릭스하운에서 북유틀란드철도를 타고 갈 수 있는 덴마크 최북단의 스카겐은 19세기 북유럽 화가들이 이주해 스카겐화파를 형성한 곳이다. 영화 ‘정복자 펠레’로 유명한 빌레 아우구스트(빌 어거스트) 감독이 그린 여성화가 일대기 ‘마리 크뢰이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기후와 햇빛이 대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안개가 낀 것도 아닌데 하늘이 희게 보일 정도로 희미하다. 독특한 하늘과 바다가 미술가들을 매료시킬만한 이곳만의 고유한 색감을 발휘한다.      


연한 청회색의 신비한 하늘빛을 바탕으로 뭉게구름이 그린 듯이 살짝 떠 있고, 바람이 몰아치는 황야와 황록색 덤불이 삐죽삐죽 자란 모래언덕 너머로 듬성듬성 바람에 쓸린 나무와 쓸쓸한 돌덩이들이 보인다. 어쩌다 등장하는 황록색 덤불이 무성한 지대에는 검은 말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햇빛에 바랜 듯한 전경은 멜랑콜리한 애상감을 자아낸다. 카데가트와 스카게라크 두 해협이 마주치며 만들어낸 퇴적 모래 위에는 양쪽에서 몰려온 파도가 포말을 내뿜으며 연이어 부딪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를 줄줄이 배태한 덴마크 특징의 집들도 눈길을 끈다. 오렌지빛이 도는 겨자색 벽에 주황색 기와를 올린 집들은 처마가 거의 없어 단단하고 마무리가 야무져 보인다. 처마가 없는 것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눈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나마 이런 산뜻한 색의 건물들이 없었더라면 우울감에 지나치게 빠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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