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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an 27. 2022

나는 아이를 배워갔다

생은 배움의 연속이다

   나에게는 추억할만한 고향이 없다.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그 후에는 2년마다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 초등학교 재학 6년 동안 다닌 학교만 다섯 군데이니 근방으로만 옮겨다닌 것도 아니었다.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옛 시절은 아빠의 고향으로 3년 남짓 거했던 지방에서의 생활이다. 가난이 우리를 이리 저리로 내몰아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내게 슬픔으로 남아있지 않는 이유는 엄마의 품이 고향처럼 늘 곁을 지켜준 탓이다.




 어떤 부모가 제 자식을 때려 숨지게 했다고 하면 그 일이 온 나라에 떠들썩하게 회자될 일이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건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엄마가 나를 사랑함은 참으로 각별하게 느껴진다. 어떤 가난은 가족의 정마저 찢기어 놓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우리 자매를 향한 부모의 정은 항상 따듯했다.

 열네 살 무렵, 많은 가장을 사지로 내몰았던 IMF 여파는 한적한 지방 시골마을에도 어김없이 들이닥쳤다. 다른 집 사정이야 어린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빠의 사업 전망은 칠흑 같았고, 엄마는 아빠의 고향을 떠나 우리 자매를 데리고 홀로 서울 길에 올랐다. 주부로서 오랜 생활을 해왔던 엄마가 서울에서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은 병원 식당의 보조 업무 같은 힘든 노동뿐였다. 어떤 날은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지만 한 달 노동의 대가는 형편이 없었다. 형편없었던 건 돈만이 아니다. 우리에겐 엄마 품에 안길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엄마는 중노동에 시달리다 집에 오면 급한 집안일을 해놓고 잠을 잘밖에 곁을 내어 줄 힘이 없었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고단한 얼굴이 사랑의 다른 모습으로 늘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


 자신을 옭아맨 가난이 아이들에게까지 미치지 않도록 엄마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셨다. 요즘은 여성이 출산과 육아와 관계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미덕이라고 한다. 버젓한 일자리라면 그 말이 맞지만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차라리 가정 주부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의 힘든 노동은 엄마의 몸을 갉아먹고 암으로 자라났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디엔가 남아서일까 나는 첫 아이를 낳고 '버젓한 일자리'를 관두고 말았다. '여자는 교육시켜 봐야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 결국 애나 키우는 가정 주부가 되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애써서 대학 교육시킨 엄마가 생각나서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나는 우리 엄마가 아닌 또 다른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굶지 않을 만큼은 벌이가 있으니 아이들에게 품을 내어주고 싶었다. 이 선택이야 말로 학교에서 배운 배움이 아닌, 살아온 삶 속에 차곡히 내려앉은 배움의 결과였다.




 아이가 태어난 후 일 년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에 감격하는 시간이었다. 눈도 못 뜨던 것이 초점이 또렷해지고, 누워만 있던 아이가 끙끙대며 몸을 뒤집더니, 기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목을 가누라고, 기어보라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힘으로 애써 배워갔다. 걷는 것도 뛰는 것도 계단을 오르는 것도 저 스스로 해 낸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숟가락질하는 법, 말하는 법 따위는 모두 집에서 배웠다. 엄마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따라서 해보려고 했다. 나는 아이를 배워갔다. 아이는 처음 맞닥뜨린 미지의 세계였으므로 모든 것이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러고보면 입덧을 하던 그 순간부터 또 다른 배움이었고, 우리는 늘 함께 배워가고 있었다. 공부가 학교의 전유물이 아님을 그 무렵 깨달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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