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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Dec 30. 2019

[책소개]: 「버블(バブル)」④

태동 – 미완의 개혁, 그리고 시기를 놓치다

「버블(バブル)」이라는 책은 2017년에 샀다. 일본이 정상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원점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되지 않은 책인 듯 하다. 책을 사놓은 채 그냥 책꽂이에 꽂아만 두다가 얼마 전 본격적으로 읽어보기 시작했다.


バブル:日本迷走の原点(新潮文庫) / 永野健二(著)


전후(戰後) 일본의 금융행정은 이른바 ‘호송선단방식(護送船團體方式)’으로 불려진다. 거대한 선단을 세세하게 간섭해가며 이끌어 나가듯, 금융기관이 한 곳이라도 망하지 않게 해주는 대신 그들의 젓가락질 하나까지도 지도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정점에는 일본 대장성(大藏省)이라는 절대권력이 있었다. 대장성은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일본 금융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을 좌지우지했고 이를 실행하는 곳이 바로 일본흥업은행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장성도 개혁의 기회는 있었다. 


버블 전야인 `80년대 전반이었다. 사토우 토오루(佐藤徹)라는 촉망 받는 대장성 관료가 있었다. 그는 `83년 6월 대장성 증권국장에 취임, `85년 1월 간암으로 53세에 사망했다. 불과 1년 반 남짓의 증권국장이었으나 그 기간 동안의 업적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증권국을 ‘자본시장국’으로 바꾸고자 했다. 하지만 대장성 내부에서의 증권국 위상은 낮았다. 당시 금융시장에서 은행의 위상과 증권회사의 위상의 격차만큼이나 대장성 내부의 은행국과 증권국의 격차는 컸다. 참고로 일본 금융업계에서 은행과 증권회사의 위상이 얼마만큼 차이 나는 지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가 간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더더욱 그 격차가 컸다.


하지만 사토우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증권국의 자본시장국 전환과 이에 따른 개혁의 주요 과제로 (1)삼국합의(三局合意)문제의 해결, (2)회사채 무담보화를 들었다. 




삼국합의(三局合意)란 일본의 은행이 해외에 지점을 두고 있는 국가에서는 해당 은행이 현지법인을 설립하는 것을 인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74년 대장성의 은행국, 증권국, 국제금융국이 모여 합의한 룰(rule)로서 당시 대장성의 지도를 무시하고 해당 국가의 법률에 기반하여 수익률을 극대화시키려는 은행들이 현지에 증권회사를 세우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대장성은 이러한 움직임까지 컨트롤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자본시장 국제화가 진행되면서 여러 형태의 증권업무 니즈가 높아지면서 삼국합의(三局合意)에 대한 불만이 늘어났다.


사토우의 또 다른 구상 중 바로 하나가 회사채의 무담보화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은행업계는 흥업은행을 정점으로 한 8개 은행의 모임인 ‘8행회(八行會)’라 불리는 수탁조직이 유담보주의(有擔保主義) 회사채(담보부회사채)의 수탁업무를 취급해왔다. 공모사채의 발행허가권을 쥐고 있던 8행회는 증권 업무에 있어서 은행우위의 상징이었고 대장성도 그 권위를 이용해 다양한 정책을 폈던 것이다. 회사채의 담보는 공장부지 등 해당 회사가 보유한 토지의 가격평가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행태는 직접금융, 간접금융을 떠나 ‘토지본위제’ 그 자체였다. 


노무라 증권 등 ‘무담보회사채’ 발행을 추진하려는 흐름과 기존 8행회의 토지를 근거로 한 ‘담보부회사채’ 발행이 대립하는 시기였다. 사토우는 이러한 ‘토지본위제'에 메스를 가하는 것이 일본 금융시스템의 변혁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담보회사채의 발행은 신용평가회사로부터 평가등급을 받고 이에 따라 발행조건이 결정되게 마련이다. 당시 해외에서는 ‘무디스’나 ‘S&P’가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힘을 쥐고 있었다. 물론 일본에서는 일본경제신문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공사채연구회가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긴 했다.


사토우의 구상은 이와 별도로 증권계와 은행이 참여한 새로운 신용평가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파워를 가진 은행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금융자유화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사토우의 최대의 타겟은 ‘흥업은행’이었다. 


수탁 8행회의 리더이며 일본 증권발행을 사실상 대장성을 대신하여 취급하는 곳이 흥업은행이었기 때문이다. 사토우는 흥업은행을 일본형 투자은행(IB)으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사토우는 흥업은행의 총재인 나카무라 카네오(中村金夫)와 반복적으로 물밑 회담을 이어갔다. 그들의 회담내용은 흥업은행이 노무라증권과 같은 위치에서 경쟁하는 증권회사가 되는 방안이었다. 일본적인 은행이라는 벼슬을 떼고 증권회사가 되는 것이 투자은행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2년 일본흥업은행법에 의해 설립되고 전범은행으로 분류되었다가 전후에도 살아남아 국책은행의 톱(Top)으로 군림해온 흥업은행의 프라이드는 확고했다. 기존 증권회사와 같은 레벨의 회사가 되는 것은 동의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은행’이라는 이름을 버리는 결정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교섭은 난항이었다. 




격무는 사토우의 암을 더욱 악화시켰고 신용평가회사 합의가 마무리 될 즈음인 `84년 10월 병세가 악화되어 이듬해 입원하였지만, 그 해 1월 사망하게 된다. 사토우의 사망소식을 듣고 흥업은행 총재 나카무라는 “그가 살아 있었다면 흥업은행이 바뀌는 길을 찾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라고 했다. 또한 그는 훗날 흥업은행이 버블의 바다에 빠져 각종 스캔들로 헐떡거릴 때에도 “버블 전 `83~`84년이 흥업은행에 있어서 최후의 찬스였다.”고 회고했다. 


삼국합의(三局合意) 폐지, 신용평가회사 설립도 사토우의 죽음 이후 무산되었다. 무엇보다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그리고 버블시대가 본격화 되면서 토지가격 상승이익을 수익의 축으로 삼은 은행의 유담보주의(토지본위제)를 재검토하려는 분위기는 사라졌다.


대장성 은행국은 스미토모은행과 헤이와상호은행의 합병과 같은 불량 금융기관의 구제를 위해 움직여도 세계적인 금융개혁, 개방의 시기에 일본 은행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는 큰 구상을 그리려 하지는 않았다.  



책의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생각해 본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버블 전의 일본에서만 국한되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어느 시기,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의 명운이 다할 때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리 개혁세력이 있어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강력한 저항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절호의 기회를 놓쳐 불운을 맞이 하는 경우 말이다. 이렇게 일본의 버블이라는 괴물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김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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