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완벽한 여행을 선물한 너, 제주

제주여행, 이것만 있으면 그냥 떠나도 돼요.

by 단짠


제주를 여러 번 다녀왔다. 가도 또 가고 싶은 여행지가 제주라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을 더 가게 될지 모르겠다. 갈 수 있는 한 많이, 자주, 오랫동안 여행하고 싶은 제주다.


모든 제주 여행은 나름의 특별함으로 기억되지만, 나의 제주여행 중 가장 완벽했던 여행이 있다. 작년 5월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이 특별함 너머 특별함으로 남아있다. 불쑥 떠나는 걸 좋아하던 소녀는, 어른이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준비된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작년 제주여행은 정말 아무 준비 없이 불쑥, 가볍게 떠났다. 그것부터 완벽한 여행의 시작이었을까?


코로나 시국으로 여행을 엄두도 못 냈지만, 그 즈음은 역병의 위세를 K방역이 꺽었다는 자부심으로 전국이 희망으로 물들어 가던 안정기였다. 그래서 포상휴가를 떠나듯,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마치 동네 산책하듯 스르륵 문을 열고 나와서 비행기를 탔고, 기내 좌석에 등을 기대자 파란 하늘이 나를 품어주며 팔을 활짝 펼쳤다. 난 그저 파란 하늘에 안겨 파란 바다 위로 살포시 내려앉기만 하면 됐다. 마치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깃털이 된 듯했다.

반바지에 슬리퍼 신고, 베낭 하나만 둘러매고 떠나는 여행이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었다. 차도 렌트하지 않았지만, 버스로 다녀도 상관없었다. 여유로운 마음이 불쑥 떠난 여행 다웠다. 그리고 제주엔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 모든 것이 완벽한 출발이다.


제주도에 먼저 와 있던 친구와 만났을 때가 저녁 식사 시간이라 우린 제일 먼저, 친구가 찾아낸 인기 식당에서 갈치 요리를 먹었다. 내가 먹어 본 가장 맛있는 갈치 요리였다. 다시 맛보고 싶어서 점심무렵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와서, 저녁 식사를 한후 다시 비행기로 집에 올 수도 있을 만큼 엄청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배부름을 가라앉히기 위해 주변을 산책하고 싶어서 식당 사장님께 '산책할 곳이 있나요?'하고 기대 없이 물었는데, 바로 옆에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고 했다. 이거 일이 착착 맞아 가는데~ 여행다운 기대감이 상승하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사장님이 알려주신 길을 향해 몇 분 걸어가니 바닷가 바위 위로 산책로가 있고 다리도 있었다. 야경이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며 제주의 숨은 명소를 거니는 즐거움을 누렸다. 마치 우리 둘만의 비밀 장소로 안내된 것 같았다. 아쉬운 건 그곳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계획 없이 갑자기 우연히 만난 곳이라서 그런가 보다. 산책로를 20분 정도 걸으니 주택가가 나왔고 곧 이어 차도가 나타 나더니 택시가 와서 우리를 태웠다. 물론 택시를 보자마자 우리가 손을 흔들었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덕분에 숙소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자 마자 친구와 나는 검색하지 않고 무작정 걸어 다니며 멋진 술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연한 발견이 만족을 주기 시작하니, 다음 이어질 우연한 행운도 기대하게 된 거다. 숙소 근처는 바다가 있고 맞은편엔 상권이 형성돼 있어서 뭔가 숨은 명소가 있을 것 같긴 했다. '뭔가 특별한 곳이 있을 거야.'하며 이 골목 저 골목 찾아다니다 벽화가 그려진 술집을 발견했다. 외진 곳에 있었고 간판과 조명이 쓸쓸해 보였지만 자기만의 색을 드러내는 담담함에 끌렸다.

역시나 가게는 실내 장식에서 메뉴까지 독특했다. 이름도 독특했는데 역시나 기억나지 않는다. 제주의 문인들이 오는 술집인지 곳곳에 제주 출신 작가들의 시와 글들이 전시돼있었다. 흥미로운 곳이었는데 한 잔 두잔 술과 얘기에 취하느라, 그 공간의 감춘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고 지나쳐 온 것이 아쉽다.

벽 안에만 갇혀 있을 수 없어! 를 외치며 술집을 나와 바닷가로 갔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광안리 방파제에 앉아 꿈과 사랑을 얘기하곤 했다. 웃고 울던 소녀들의 방파제를 중년이 되어 다시 앉아보는 기분이 너무나 신선하고 상큼했다. 과거로의 여행이 아닌, 청춘으로의 여행이었다. 다시 청춘이 되어 바닷바람에 설레며 순간에 충실했던 청춘의 날들로 찾아갔다. 친구와 나는 그 순간을 온전히 누렸고, 그 밤 방파제 위에서 우리는 청춘의 시간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친구가 찾은 제주 국수 맛집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고 작지만 연륜 있는 식당에서 비말 칼국수를 맛있게 먹은 후, '다음은 어디로 갈까?'를 서로에게 물었다. 마침 식당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그럼, 우리 다음 장소는 버스로 이동할까?" 버스 정류장 노선을 보니 애월바닷가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런 게 자연스러운 진행이란 거다. 그런데 한 15분쯤 버스를 타고 갔을까? 친구가 "우리 반대 방향으로 온 것 같아." 우리는 급하게 차에서 내렸고, 이번엔 카카오 지도로 검색을 했다. 우리가 가려고 했던 목적지의 반대로 와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할까' 잠시 멍해 있는데, 그때 버스가 지나갔다. 함덕 해수욕장이 쓰여있는 버스였다. "우리 저기 가자!" 얼마후 다시 함덕으로 가는 버스가 와서 기사에게 노선을 물어보니 반대편 정류장으로 가라고 했다. 햇살이 맑고 하늘은 푸르르고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해서 정류장을 헤매는 것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둘이라 편안하고 자유롭고 무엇보다 이 시간에 완전하게 머물러 있었으니까.

버스를 타고 가는 길도 예뻤다. 렌트카로 이동하는 편리함은 줄 수 없는 버스의 덜컹거림마저 앨리스의 모험처럼 여겨졌다. 버스정류장마다 비슷한 듯 다른 풍경이 제주를 더 가깝게 느끼게 했다. 작지만 담장 색이 예쁜 초등학교 운동장, 간판이 특이했던 카페들이 몽타주처럼 떠오른다. 둘이라서 충분했던 그 날의 시간, 그날의 제주였다. 20여 분 후 도착한 제주 함덕 해수욕장은 아름다움의 결정체였다.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예쁜 색을 모아 놓은 바다! 그 바다가 에메랄드빛으로 춤을 추며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런 찬란함을 보고도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린 바다로 뛰어들어 맨발을 적셨고 두 팔도 활짝 펼쳤다. 하늘을 품은 바다를 우리 두 팔 안에 담을 수 있을 듯이 옆으로 자꾸만 팔을 더 펼쳤다. 그러다 우리 둘의 손끝이 서로를 간지럽혔고 우린 까르르 웃었다. "너랑 같이 와서 좋아." "나도." 나의 긴말에 늘 짭게 호응하는 친구가 얄미워서 휘릭 친구팔을 잡아끌어 바닷 속으로 밀었다. 아뿔싸 친구만 바닷속으로 풍덩 할 줄 알았는데, 나도 따라 풍덩 하며 물거품을 유쾌하게 솟구쳐 올려 갈매기를 놀라게 했다.

흠뻑 젖은 우리는 준비해 온 여벌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놀랬다. 큰 규모라서 사람들이 많이 오나 보다 했는데, 그 생각은 10분 후 바뀌었다.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와 긴 의자 위에 누워 발을 뻗으니 이런 호사를 누려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긴 방갈로 의자가 곳곳에 여러 형태로 놓인 카페 는 캐노피 창도 잘 설치해서 햇볕에 지치지 않는 휴식 공간을 만들었다. 배려가 남다른 카페라서 그랬을까? 5월의 눈부신 날씨 덕분일까? 친구와 함께라서 가능했을까? 그 날 잠시 머문 카페에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주 바다와 하나가 됐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한 시간 남짓했지만, 가슴을 충분히 채워줬다. 잠시 눈을 감고 그날 바다에 들어가 하늘을 느끼던 나 그리고 너를 다시 불러 본다. 그날처럼 살자.

6시 비행기를 타기 전 제주기사 식당을 찾아서 식사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걸어서 물어물어 찾아 가는 재미가 컸는데 맛은 없었다.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에 카페 한 군데 더 들렸다. BTS가 다녀간 카페라고 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를 검색해서 찾아간 보람만큼 경치가 제대로 제주를 품은 바다였다. 버스 타고 다닌 하루였지만 정말 알차고 행복했던 내 생애 최고의 여행이었다. 또 친구랑 같이 가고 싶다. 내게 너무나 완벽한 여행을 선물한 그 날 이후 나는 제주와 깊은 사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