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에서 불어온 바람

가재가 노래하는 곳 - 책이 편지를 쓰게 했다

by 단짠

카야, 안녕? 카야를 만나서 기뻐. 2021년 상반기엔 좋은 일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카야를 만난 일이야. 왜냐고? 카야의 삶이 나를 ‘외롭다’라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줬거든.

나도 카야처럼 외롭게 자랐어. 어른들이 만든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힘없고 외로운 아이였어. 하지만 이젠 내가 외롭게 자랐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어.

외로움이나 사랑과 같은 추상명사는 ‘누가 누구보다 더’라고 비교할 수 없지만, 극한에 가까운 외로움과 사랑은 절대적이라서 비교 가능하단 걸 알게 됐으니까.


카야가 겪은 이별의 책임을 너의 가족들 아니, 너의 아버지에게 따지고 싶어. 떠난 사람에겐 저마다의 이유가 있지만, 남겨진 카야에게는 그들이 떠날 이유가 없어. 가족이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버리고 혼자 남겨진 외로움,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함. 이런 고통은 여섯 살 아이가 겪어선 안 될 일이고, 견딜 수도 없는 일이야. 그럼에도 카야, 너는 견뎌냈어. 아니 생존만 한 게 아니라 습지를 사랑하면서 스스로 위대해졌어!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습지가 카야를 지켜주었고, 카야는 습지에 사랑으로 보답했어. 늪의 생명체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자세히 바라봤고,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려 했고 그걸 기록했으니까. 자세히 알아가고 늘 함께 있는 것, 그런 게 사랑이니까. 카야는 늪ㅡ습지를 사랑한 거야. 버려진 땅, 늪을.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습지가 카야를 지켜주었고, 카야는 습지에 사랑으로 보답했어.


절대적인 고통을 사랑으로 극복해낸 카야는 ‘누구보다 더!’라는 비교가 가능한 사람. 그래서 더는 나의 성장기 때 겪은 일로 외로워하지 않기로 했어. 카야가 더 불행했기 때문에 내가 덜 불행하다는 뜻이 아니야. 카야가 견뎌낸 힘의 위대함에 압도되어, 나에게도 그 힘이 전해졌다는 뜻이야.


카야, 인생은 참 욕심이 많아. 인생은 무지개 중 하나의 색도 빠지지 않고 채워지길 원하니까. 우리가 여섯 살일 때도 그 욕심을 숨기지 않았어. 그런 면에서 인생은 참 야속해. 그러나 다행히 친절하기도 해서 카야 곁에 점핑, 테이트, 메이블과 같은 좋은 사람들을 보내줬지만, 한두 명으로 채워지는 인생이 아니라서 여전히 친절하지만 야속하고 욕심 많은 인생이야.

가족, 친구, 스승. 살아가는 데는 여러 사람이 필요해. 아침 한 끼 먹고 배부르다고 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살 수 없잖아.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디저트까지. 저마다 다 필요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야. 점핑같이 든든한 어른도, 테이트같이 사랑을 나눌 연인도. 집에 오면 언제나 반길 가족도. 같이 해변을 뛰어다닐 친구도 필요한데, 여섯 살 카야에게는 굶주린 배를 채울 최소한의 식사만 허락됐듯 사랑도 죽지 않을 만큼만 주어졌어.

그러나 카야는 외부로부터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해서 시들지 않았어.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고사리처럼 쑥쑥 잘 자랐지. 그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참 단단한 카라.

내가 지금 한 말을 카야가 좋아할 거 같은데?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네가 보여.

네가 나에게 쉽게 말을 걸어오진 않겠지만, 네가 사는 통나무집에 찾아가면, 카야는 나를 배에 태우고 습지로 안내해 주고, 해변에 앉아 너의 깃털을 소개해 주겠지?


카야, 인생은 참 욕심이 많아. 인생은 무지개 중 하나의 색도 빠지지 않고 채워지길 원하니까.



카야의 해변에 앉아 너의 자연을 만나는 상상을 하다가 문득 카야가 청소하는 장면이 떠올랐어. 엄마가 떠난 며칠 후였지. 가족 모두가 떠난 후였나? 울며 자지러지다 쓰러지면 어쩌지 걱정한 내가 무색할 만큼 너는 강인했어. 카야가 청소하는 장면에서 ‘이 아이는 잘 살아내겠어.’라고 감지했지.

별거 아니지만 세수하고 양치하고 청소하는 일이 어떤 일보다 중요해. 사람다움을 지키는 기본 존엄성이 무엇인지 카야는 알고 있었던 거야. 그건 엄마로부터 배운 것 같아. 카야의 불쌍한 엄마로부터.


엄마는 고통과 고통을 견디려는 힘이 충돌해서 결국 뇌가 폭발해버렸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책임지려고 했어. 삶을 사랑하는 만큼 남편으로부터 받는 고통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도 그녀는 아이들과 행복하려 애썼어. 한 사람의 악이 어떻게 주변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보여준 끔찍한 아버지의 학대. 그녀가 삶을 덜 사랑했다면, 친정아버지께 달려가 도움을 청했을 텐데, 그녀의 자존심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거야. 어떻게든 잘 살아내려 애쓰다가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버린 거야.

지독한 폭력은 그렇게 끔찍한 거였어. 아버지가 아내와 아들을 학대할 땐, 한 어른의 악함이 온 세계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소식을 들은 내가 충격받았을 정도니 그런 상황을 반복해서 겪은 엄마는 정신을 놓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사랑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생각으로 카야도 엄마의 떠남을 이해하고 용서했겠지?


외부로부터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시들지 않고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고사리처럼 쑥쑥 잘 자랐어.
그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참 단단한 카라.


테이트와의 이별이 없었다면 위험한 체이스를 만나지 않았을 텐데. 가장 절박할 때. 최악의 상황으로 안내할 악연을 소개해 주는 인생. 역시나 인생은 욕심 많고 야속해. 인생의 아킬레스건을 허락해 주니까. 반면에 테이크와의 인연처럼 카야가 아빠마저 떠났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 테이크가 아빠를 잃었을 때같이 모든 걸 잃어버린 순간, 둘이 하나 되어 잃어버린 걸 새롭게 채워갈 인연을 보내주기도 해. 가장 불행한 순간에 가장 행복한 인연이 완성되는 기적. 그건 인생의 친절함.

우리는 인생이 안내하는 대로 가야 하나 봐. 인생과 등지지 않고 인생의 흐름에 귀 기울이면 인생은 친절을 베푸니까. 나는 그 흐름을 타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아. 내가 한결 자유로워진 이유가 여기 있어. 카야도 그 비밀을 알았을 거 같아. 그리고 그 힘을 잘 다스리는 법 아니, 그 힘의 뜻을 따라가며 더욱 조화로워지는 법을.

그랬기 때문에 자기 삶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나는 그 사건이 카야의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그 선택 후 다른 선택을 위해 인생과 의논하진 않았던 거 같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현실마저 순응했으니까. 그 끔찍한 선택 후 인생과 자연 그리고 테이트에게 늘 감사하며 충분히 매 순간을 누리며 살았을 거 같아. 인생에서 써야 할 모든 선택을 단 한 번에, 모든 호흡을 다 불어넣어서 했을 테니까.

나는 카야의 마지막 선택을 존중해. 그 어떤 전쟁보다 절대 가볍지 않은 카야의 전쟁이었으니까. 전쟁에서 이긴 카야!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어. 카야, 넌 너를 용서했을까? 솔직히 굳이 답을 듣고 싶진 않아. 카야를 충분히 이해하니까.

가장 절박할 때, 최악의 상황으로 안내할 악연을 소개하는 인생.
역시나 인생은 욕심 많고 야속해. 인생의 아킬레스건을 허락해 주니까. 반면에 테이크와의 인연처럼 카야가 아빠마저 떠났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 테이크가 아빠를 잃었을 때같이 모든 걸 잃어버린 순간, 둘이 하나 되어 잃어버린 걸 새롭게 채워갈 인연을 보내주기도 해. 가장 불행한 순간에 가장 행복한 인연이 완성되는 기적. 그건 인생의 친절함. 우리는 인생이 안내하는 대로 가야 하나 봐. 인생과 등지지 않고 인생의 흐름에 귀 기울이면 인생은 친절을 베푸니까.


카야가 습지에서 잘 살 듯 나도 글 숲에서 잘 살고 싶어. 카야도 늪이라는 곳을 사랑하기까지 홀로 견뎠듯이 나도 다시 견뎌볼게. 슬픔이 방울방울 맺혀도 사랑으로 자란 카야와 나는 축복의 아이일지도 몰라.

카야는 습지에 나는 글의 숲에.

카야에게 찾아왔던 많은 일들이 카야를 망가뜨릴 수 없어서 감사해.

카야가 갑작스럽게 죽을 때, 카야는 죽는 걸 알았어? 몰랐을까? 음.. 카야가 죽어가는 순간을 왜 궁금해하냐면 카야가 어쩌면 습지와 하나가 될 완전한 순간을 기다려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래서 죽는 그 순간 0.001초라도 죽음을 감지했다면, 카야는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았을 것 같아.

'내가 습지가 되는구나.'


카야.. 나는 카야를 만나서 외로움이란 굴레에서 한 발 더 자유로워졌어. 카야가 홍합을 캐서 기름과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점핑네 가게에 갔듯이, 나도 나의 글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살아갈게. 카야를 만나서 참 좋아. 카야는 내 인생 앨범에 소중한 친구로 저장했어. 아들에게도 카야를 소개해 줄 거야.

카야! 당신의 습지를 언젠가 가 볼 수 있을까? 적어도 당신이 사랑했던 습지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내 볼을 스칠 때, 카야를 느낄 순 있겠지? 이제, 당신은 내게 바람이야. 습지로부터 불어온 바람. 산책길마다 만날 나의 카야. 당신을 사랑합니다.


카야가 습지에서 잘 살 듯 나도 글 숲에서 잘 살고 싶어. 카야도 늪이라는 곳을 사랑하기까지 홀로 견뎠듯이나도 그런 시간을 다시 견뎌볼게. 슬픔이 방울방울 맺혀도 사랑으로 자란 카야와 나는 축복의 아이일지도 몰라.


*카야가 살았던 습지를 습지의 일부인 늪으로도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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