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백지수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백지와 더불어 시간이란 자원까지 챙겨 준다. 내가 쓴 목록대로 사용했는지 안 했는지 하루치 결산을 하지도 않는다. 24시간이란 백지수표를 주고, 그 위에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쓰게 하지만 결과를 따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윤을 따지지 않는 거래를 매일 하는 하루야말로 백지수표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당연히 주문한 대로 매일 배달되는 우유쯤으로 여겼는데, 매일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니! 내가 구겨서 버린 수백억 개의 기회가 재가 되어 내 위로 흩뿌려지는 기분이다. 아니, 재에 덮여버려 검은 봉지가 돼버린 소름 끼침이다.
'배달된 건 우유만이 아니었어! 너, 정체를 더 빨리 알려주지 왜 숨겼니?'라고 따질 텐가? 질문과 성찰이 없는 삶이 만든 무지의 결과를 오늘에서야 맞닥뜨린다. 인생은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해설지도 없다. 무에서 시작해서 무로 돌아갈 때까지 스스로 찾아야 한다. 게을리 찾거나 생각 없이 남들 따라가다 보면 백지수표를 매일 발밑에 버리는 짓을 반복하게 된다. 질문할 때마다 답을 찾을 순 없더라도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오늘은 어떤 하루였나'를 살피는 성찰이 쌓여가면 인생이 적당한 때가 되면 답을 알려준다.
그렇다. 난 백지수표를 19,249회 받았다. 오늘 받은 하루치까지 합치면 19,250회째이다. 이 숫자는 기회를 19,250회 선물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백지수표를 잘 사용만 했어도 백만장자가 됐을 텐데. 나에게 백만장자란 숫자가 아닌 욕구 충족이다. 충만감 백만장자를 꿈꾸며 사는 게 나란 사람이다.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를 만족하며 살고 있는 상태 말이다.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감과 애정 욕구, 존경 욕구 그리고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5단계를 얼마나 충족하며 사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니 그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답한다.
어떤 면에서도 백만장자가 아니라면? 하루라는 백지수표를 잘 사용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괜찮다. 사람은 결과에 집착하고 나도 지금 내 삶을 결과물로 보고 점수 매기지만 인생은 결과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과정이며, 인생은 과정에 집중한다. 그래서 하루치 결산을 하지 않는 것 아닐까?
19,250회째 하루를 살지만. 인생은 중간결산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난 벌점이 많아서 벌칙을 받느라 남은 생을 다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하루가 배달될 날이 얼마 남았는지를 모르듯이.
"아민아, 너 오늘 뭐 할 거야?"
"글쎄, 아직은 몰라."
이렇게 시작하지는 않아야겠다. 백지수표를 받고도 '어떻게 쓸 줄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면 그건 반납하는 거니까.
"아민아, 너 오늘 뭐 할 거야?"
"읽고, 쓰고, 걷고, 기도하고 찐하게 사랑할 거야."
나에게 하루는 백지수표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백지수표를 쓰는 중이다. 내 마음대로. 그러나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질문하며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그럴 수 있어서 감사하다. 역시 백지수표는 위대한 가능성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