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워 보였다. 그가 입은 옷매무새와 달리 표정도 태도도 여유 있고 품위 있었다. 신문지로 감싼 꽃다발이 더 멋져 보일 때가 있듯이 10년 전부터 입었을 듯한 체크무늬 셔츠와 무릎이 후줄근하게 튀어나와서 운동복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낡은 청바지가 가짜 금칠을 한 사람 사이에서 빛나 보였다. 이 파티와 안 어울리듯, 앞뒤가 안 맞는 남자였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있는데도 홀로 고요했고 참가자가 아닌 관찰자 같았다. 관심이 있으면서도 관심에 끌려가지 않는. 아무튼 여기 있는 누구와도 달랐다.
그러나 그가 입은 옷의 라벨과 가격을 따져야 하는 나로서는 그가 가진 여유로움이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아마도 그에게 끌려서인가 보다. 딱 봐도 끌려서는 안 되는 견적인데도.
물론, 나였다면 그와 어울렸겠지, 그러나 지금 나는 성아다. 그는 성아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다. 나는 오늘 성아 대신 파티에 나온 거고 성아가 별 스타에서 알게 된 후 호감을 느끼다 결혼까지 갈 뻔했던 남자와 처음 한 약속을 지키러 온 것뿐이다. 그 남자를 찾고, 만나고 실물을 확인하고 천안으로 내려가면 된다. 운 좋게 포장지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남자와 짝이 되면 더 좋겠지만 오늘도 특별한 일은 없겠지? 대리는 대리로 끝나곤 했으니까
여기 들어온 지 30분이 지나도록 그를 못 찾았다. 아마도 그 남자도 성화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같다. 입장할 때 목에 걸어 준 명찰에 성아의 닉네임 '레드 지니'가 적혀 있는데도 아무도 온라인상에서 뜨거웠던 인연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피드에서 유명하시잖아요' 정도가 다였다. 게다가 성아가 말했던 '사진만 봐도 녹아내릴 것 같은 미남'은 보이지 않았다. 저 남자라면 모를까.
혹시, 저 남자가?
성아가 실물을 확인하고 싶어 한 남자의 닉네임 뭐였더라. '빅 케이'. 왜 난 명찰을 확인할 생각도 안 했을까. 재빨리 그를 향해 시선을 꽂았다.
그 남자가 저 남자!
전혀 다른 사람이다. 성아는 저런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 성아가 보내 준 사진을 핸드폰에서 다시 확인해 봤다. 닉네임은 '빅 케이'인데 얼굴이 다르다. 그에게 관심과 경계를 동시에 갖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여유로움까지 느꼈던 건 착각이었다. 오히려 우습기까지 했다. 나와 같은 대리였다니.
그가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봤던 건 내 명찰을 본 거였구나. 나를 본 게 아니고. 근데 왜 다가오지 않았지? 이상하다.
제길, 대리가 대리를 못 알아보다니.
어쨌든 임무는 완성했으니 마음 편하게 놀다가 가야겠다. 핸드폰을 꺼내서 성아에게 '너의 썸남도 너랑 같아'라고 문자를 보냈다. 자, 이제 어쩐다? 눈길이 머문 저 남자에게 다가갈까? 아니다. 잘 생겼지만 허름한 남자는 별로다. 게다가 명찰을 봤는데도 안 다가오는 것도 기분 나쁘고, 뒤늦게 다가온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별 스타에 명품으로 도배된 뒷모습만 올려서 성아 얼굴은 모를 텐데, 나를 보고 실망해서 안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그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성아다. 성아답게 행동해야 한다. 그를 무시하기로 한다.
성아가 약속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오늘 드라마는 미션 클리어 앤딩이다. 더 완전한 결말을 위해 '너를 봤지만, 네가 안 다가와서 서운했어. 하지만 나도 네가 별로라서 안 다가가'라는 마무리 동작을 취하면 완벽한 마무리다. 잔을 들어서 그를 향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센스까지 보태며. 그러다 다가오면 적당히 인사하고 아니면 말고.
그는 모임이 이어지는 동안 다가오지 않았다. 기분 나쁜 남자다. 가끔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환하게 웃으며 대화할 뿐 계속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파티룸 기둥에 녹아들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그냥 즐기자. 성아의 약속을 대신해서 왔지만, 오늘 밤 나를 성아의 위치로 데려가 줄 남자를 만나길 기대했다. 임무가 끝났으니 나의 욕망에 충실할 차례다. 딱히 충족할 거 같진 않지만. 끝날 때까지 인생은 과정을 모른다. 일단, 즐기자.
그 남자가 거지 옷을 입은 왕자든 실제로 거지든, 공주 옷을 입은 거지 같은 내가 문제다. 그런 나를 알아챈 걸까? 외모로는 성아보다 낫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도 나한테 다가오지 않은 걸 보면 분명 그는 가짜를 알아본 거다. 본인도 가짜면서. 즐기기는커녕 자꾸 그 남자 때문에 근거 없는 억측만 해댔다. 그냥 자꾸 심술이 났다. 성아의 명찰을 달고 성아의 옷을 입고 성아의 직업으로 나타나면, 어디를 가도 주목받았는데. 왜?
가난보다 대학을 중퇴한 것보다 비정규직인 것보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 속상하다 그런데 그걸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성아가 아닌, 비슷한 환경의 친구와 만났더라면 자신을 스스로 비아냥거리게 됐을까?
왁자지껄하게 이 사람 저 사람과 얘기하고 건배하면서도 생각의 끝은 성아와 나 그리고 그 남자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자꾸만 술잔을 들이켜면서.
10시 20분. 여기서 걸어가면 터미널까지 15분 걸린다. 택시를 탄다고 해도 그 정도 시간은 걸린다. 오늘 어쨌든 천안으로 내려가야 된다. 막차를 타려면 지금 출발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비틀거렸다. 바로 옆에 앉은 남색 슈트가 잘 어울리고 말솜씨가 유창한 '뽀짝님'이 부축해줬고, 대담하게 분홍색 니트를 입은 가슴 근육이 발달한 '헬맨'은 더 놀다가 해장국까지 마시고 가라고 붙잡기도 했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건 나 혼자였다. 나한테 부지런히 건배를 권하던 남자 중 누구도 나를 배웅하지 않았다. 연락처를 묻지도 않았다.
조심해서 가. 만약에 차 놓치면 돌아와.
미친놈들 술 취해서 비틀거리다가 버스를 놓칠 수도 있는데, 한 놈도 택시 태워주러 따라 나오지도 않는다니, AI와 같은 만남과 헤어짐이다.
성아였다면 배웅을 제대로 받아 냈을까? 호들갑스럽게 호감을 보일 땐 언제고. 진심이라고는 1도 없는 치사한 것들. 오늘 밤 그 녀석들 견적서에 나는 올라가지 않았나 보다. 술 취한 몸보다 마음이 더 비틀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택시는 금방 잡혔다. 택시를 타려고 몸을 숙이자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그때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엄마야
비명을 지르며 돌아봤더니 그 남자였다. 성아의 오늘 목적지였던 빅 케이 아니, 그의 대리였다.
- < 일단 쓰는 소설 1, 뜻밖에 우리 > 는 12부까지 이어집니다. 완성된 후 겨울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다음 주부터 < 일단 쓰는 소설 2, 내겐 너무 달달한 새끼 > 초고를 격주로 4편까지 이어가겠습니다.
- < 내겐 너무 달달한 새끼 > 도 기대해 주세요. 치료 받으며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느리고 부족하지만 꾸준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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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