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결혼 생활에 기러기 부부의 삶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있다면 1-2년 정도이거나 함께하는 낭만적인 외국생활일 거라고 생각했다. 2017년, 아이가 돌이 막 지나고 남편이 해외로 나갔다. 10살 어린 나와 14개월에 접어드는 써니 이렇게 둘만 남아 서울에서의 생활을 2달 동안 마무리하고 대구 친정집으로 내려왔다. 험난한 생활과 서로의 마음고생이 불을 보듯 빤히 보이는 앞날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이혼하고 딸과 그 딸의 딸까지 함께 거둬야 한다는 막막함으로 마지못해 내려오라고 하셨다. 덕분에 사는 내내 "결혼 잘못시켰다. 그때 뜯어말려야 했다"는 친정 엄마의 한 맺힌 잔소리를 듣고 있다.
남편의 나이 마흔셋에 낳은 딸이라 남편은 딸 사랑이 유독 깊었다. 대기업 부장이었던 그는 아마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심하고 바쁠 시기임에도 신이 내린 아빠였다. 임신기간 내내 출산 관련 클래스를 함께 다니고 배가 불러오기 전부터 내내 뱃속 아이와 살가운 태담을 주고받았다. 콩알만 한 존재에게 질투를 느낄 만큼, 내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건가 싶을 만큼 애정이 있었으니 태어나서는 오죽했을까. 미리미리 남편을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시키고 엄마들의 권한일 것 같은 고난도 육아 테크닉을 조금씩 남편에게 가르쳐 주며 남편은 슈퍼 대디가 되었다. 내가 집을 2박 3일 비우는 날에도 이유식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빨래를 삶고 젖병과 여러 도구들을 삶아 놓는 것 까지 잘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남편에게도 눈에서 하트가 나오는 눈빛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음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고, 결혼 적령기 아니 조금 늦은 나이에 들이대기도 편하고 둘러대기도 편안한 10살 어린 나는 참 쉬운 사람이었겠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남편은 딸에 대한 애정으로 많은 것을 버리고 더 오래, 더 길게 갈 수 있는 직장을 선택했다. 자신의 동료와 선배가 어떤 모습으로 40대 초반에 은퇴를 하게 되는지 늘 생생하게 봐오며 나와 이야기했다. 사내결혼을 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업계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아마 이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이라고 떨어져 살아도 아이를 위한 삶이라며 이런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반면에 남편은 죽을 것 같은 이 타지 생활을 두 번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처음엔 1년에 2번 정도 들어와 일주일을 머물렀다. 머무르는 내내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만드려고 노력했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삶이 싫어서 작은 일에도 버럭하고 예민해지는 그가 미웠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했다.
기러기 부부 1년 차엔 거의 매일 페이스톡을 했다. 2년 차엔 일주일에 2번 정도 통화를 했다. 3년 차엔 1번을 했고 4년 차부터 지금까지는 2주일에 한 번 정도 페이스톡을 한다.
전화를 못하면 카톡이라도 자주 주고받았는데 지금은 2주 동안 서로 연락이 한통 없지만 우리는 이상해 하지 않는다. 그러다 가끔 이상한 꿈이라도 꾸면 먼 타지에서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화들짝 놀래서 전화를 해서 생사를 확인하니 이게 무슨 결혼생활인가 싶다. 청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한달에 내 수입이 500만원을 찍는 그날 당신에게 이혼서류를 보내겠노라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남편의 급여일이 되면 남편은 생활비를 입금한다고 연락이 오고. 나는 마치 급여를 받는 사람처럼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이 생활이 5년째 접어들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남편이 밖에서 고생 고생 산 고생 다 하며 번 돈으로 나와 아이만 편히 지내는 것 같아서 자주 미안해지기도 하고 이 날벼락 같은 상황으로 나를 몰고간 그에게 한번이라도 소리지르며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절대 어울리지 않는 2가지 감정이 내가 이기니. 니가 이기니. 했다.
부정적인 감정에 물들여진 상황에서 그에게 돈을 받는 행위가 인지부조화되는 꼴이니 마음 한 쪽 어딘가가 늘 불편했다. 하지만 일을 구할 때에도 아이를 돌보는 것을 함께 염두에 두며 직업을 찾아야 했고 상대적으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남편은 일 하고 싶은 만큼 일하고 퇴근하면 편히 쉬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니 괜한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갖지 말자고 되뇌기도 했다.
이렇게 대놓고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해도 될까 싶을 만큼 서로의 생사마저 관심을 놓고 지내는 생활이 대략 내가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본의 아닌 남편의 빚잔치 커밍아웃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아이의 선하고 맑은 눈망울은 지키고 책임지는 엄마가 되고 싶어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지방의 작은 중소기업에 입사했다.내가 할 수 있는 최 단기간에 종잣돈을 만들어야 심리적인 안정감이 생길 것 같아서 오로지 나의 머릿속에는 돈 벌기로 가득 차 있었다.배신감과 증오심이 나를 뚫고 나와서 내가 나를 못 견딜지도 모르니 누구를 더 챙기고 어쩌고 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상처 받을 가족을 생각하며 아무도 이 사실을 알게 하기 싫어서 아이가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원래의 상황으로 돌려보자며 악에 받혀서 일을 했다. 피곤했다. 모든 워킹맘이 느끼듯.. 육아를 해주시는 친정엄마의 눈치를 보는 일도.. 주말에 아이를 돌보는 일도.. 각족 잡다한.. 남편이 해줬으면 하는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나 혼자서 하려니 감당이 안될 때가 많았다.
입사 1년이 지나자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180만 원을 받아서 나는 과연 아이가 7살이 되는 해에 집을 살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돈 벌겠다고 입사한 회사이니 미래를 기대할 직무도 아니었다. 시간을 거슬러 전문성이 깊어지는 포지션이 아니니 답은 한 가지. 내가 내 밥벌이를 월급 이상으로 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었었다. 그렇게 퇴사 직전까지 살아내고자 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로 마냥 편안하게 던지는 것 같은 남편의 문자와 전화를 자주 씹어버렸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연락이 오지 않으니 남편은 불안해했다. 행여 집에 빚 독촉 전화라도 와서 와이프를 힘들게 하진 않는지 그런 걱정 들을 하는 것 같은데 말로 드러내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불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강의 준비한다고.. 이번 달은 좀 많이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무늬만 부부에 속은 싱글맘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남편과 알콩달콩 미래에 살게 될 집을 꿈꾸고 함께 돈을 모으고 같이 만들어가는 우리 집 설계는 나의 결혼생활에 영영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코로나가 터진 직후부터 많은 것이 달라진 한국의 상황들을 접했을 그는 내가 이토록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아이를 키우며 조금 더 편안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노력에 대해 알고 있을까? 집값이 자고 일어나면 몇 천만 원이 뛰어 있고 물가는 오르는 상황을 알기나 하는 걸까?
왜 나만 고군분투하는 것일까? 억울함이 밀려왔다.
일하는 중간에 시간을 내어 네이버 부동산을 뒤적 뒤적하고... 사주에 없는 주식투자를 해보고 말짱하게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단 50만 원이라도 몸값을 높이려고 프리랜서라는 개똥밭에 구른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엄마, 우리 집은 너무 좁아. 할머니 집으로 갈래. 하며 옆집에 사는 할머니네로 휭~ 하고 가버리는 딸아이의 말에 너무나 무능력한 엄마가 된 것만 같은 자괴감을 그는 알고 있을까?
다른 지역의 강의로 새벽 5시에 나와서 고속버스를 타고 3시간을 이동해 오전 강의를 해야 했던 날, 피곤함으로 눈을 붙이고 싶지만 잠시의 여유도 없이 HTS를 열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계좌 잔고를 보며 마음을 졸였다가 또는 기뻤다가 내가 찜해 둔 종목이 상한가를 치는 것을 보며 가슴을 내리치는 나를 보았다면 남편은 나를 안아주었을까?
그럼에도 한 가지 굳건한 믿음은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고.. 나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이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아무나 할 수 없는 두려운 길을 선택한 그를 지지했고 그의 삶이 더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너 때문이라고. 모든 게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꺼낼 수 없었던 것은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이의 생일날 전화하지 않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삶에서 전부인 아이의 생일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는 연락이 없었다.
작은 생일 케이크와 트램펄린 파크 수제버거 정도로 끝난 조촐한 아이의 생일이 너무 미안했다.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시기에 느껴야 할... 와.. 엄청나.. 하는 서프라이즈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참다가 전화를 했다.
자기야... 바빠?
회사 오너가 현지를 방문해서 바쁘다고 했다.
혹시 써니 생일인 건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전화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바빠 보여서, 더 할 말이 없어서 전화를 끊었다.
친정엄마가 들으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써니야.. 너네 아빠는 뭐한다고 니 생일날 전화도 한 통 없노? 안 이자뿔낀데...
엄마의 혀 차는 ㅉㅉ 뒤에 나는 어떤 말이 숨어져 있는지 알고 있다.
흔히 남자들이 기러기 부부로 오래 지내게 되면 여자 친구가 생긴다. 현지처 어쩌고 저쩌고.. 그런 최악의 드라마를 엄마는 그리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아이라는 연결고리로 아슬아슬하게 이 결혼이 유지됨을 말은 하지 않지만 우리 부부 모두 알고 있다.
종착역이 어딘지.. 언제쯤인지 알 수 없기에 공허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오늘 밤에 전화하며 또 허공에 분무기를 뿌리듯... 무미건조한 서로를 배려하는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원망의 마음은 크지만 부부싸움을 전혀 하지 않은지도 2년이 넘었으니 이젠 남은 애정마저 증발했음을 알고 있다.
아이에게 예쁜 엄마 아빠로 와글와글 까르르 낄낄 소리가 나는 가정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
더 넓은 집에 대한 갈망, 나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결핍을 겨우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갖게 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더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글밭에 긴 한숨을 털어내고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해본다. 어제보다 오늘 1cm 전진하고 1그램 무거워질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들에 나를 궤도로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