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나에게 처음이란 시작하기 전부터 불안한 감정이 동반되는 참 불편한 단어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겠지만 30대 후반의 나에게 처음이라는 말은 기대보다 막연함이 주는 두려움에 훨씬 가까이 있는 말이다. 끝그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 하나 조차 찍을 용기가 없어서 주저하는 마음을 누가 알까봐 창피했다. 처음인데 잘하고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눈덩이 처럼 불안함도 함께 커졌다. 첫 술에 배를 채우려는 욕심많은 스쿠루지 아줌마가 딱 내모습! (웃음)
나의 일은 언제나 백지에 가까운 상태에서 시작된다. 강의요청이 들어오면 ppt의 하얀 슬라이드를 대략 20개 가량 모아놓고 어떤 구성으로 기획을 할까? 라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모니터에 떠있는 20개의 하얀 네모를 보고 있으면 갑갑해진다. 내가 이번일을 제 시간에 끝낼 수 있을까? 하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과 완벽함에 대한 압박으로 제목을 타이핑 하다가 3-4시간이 흘러가버리기도 한다. 항상 하얀 상태에서 시작하는 내 일이 너무 무거워 등에 이고다닌다는 느낌을 받을 때면 종종 숨어버리고 싶고 못하겠다고 포기선언도 하고싶다. 도대체 나는 무슨생각으로 처음하는 이 일들을 하겠다고 질렀을까? 싶다가도 안하겠다고 내뱉지 않는 걸 보면 그 안에는 분명 하고싶은 욕망이 있었다.
2021년의 절반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처음이 있었다.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사람들을 보면서 강의를 하다가 처음으로 온라인 환경에서 실습까지 병행하며 강의를 했던 일, 편집도 해본적 없는 실력으로 VOD강의를 집에서 제작해 본 일, 두 달 동안 자기발견 글쓰기를 브런치에 연재 한 일, 온라인 학습 플랫폼에 라이브 강의를 진행하는 일. 이렇게 굵직한 4가지 일을 해내는 동안 나의 처음에는 쫄림이라는 친구가 항상 따라다녔다.
내가 저지른 처음에 어떻게든 책임을지는 사람은 되고싶어서 꾸역꾸역 해내다 보면 결국 완결의 순간이 찾아온다. 강의를 마치거나 완성된 결과물에 대한 이메일 발송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또 한뼘 자라서 다른 처음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버전 업그레이드를 한다. 한달 에세이쓰기를 시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전의 수없이 많은 쫄림을 견뎌낸 크고 작은 처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처음이 없다면 끝도 없고 결국 다른 처음으로 이어갈 수 없다. 처음을 해내는 힘은 결국 불안한 처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