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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Apr 11. 2019

#.나에게 예술은 세 번 태어난다

프롤로그

[프롤로그] 마이너리그에도 예술의 향은 흐른다.


  한때의 예술은 분명 부르주아가 즐기는 대상이었다. 이름난 예술인과의 교류나 작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기에 드러난 예술의 모습이었다. 사회구조에서는 언제든지 불합리한 현실이 나타난다.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와 휴머니티의 상실에서 예술의 저항이 생기기도 한다.

  예술작품이 모든 사람에게 꿈을 실현해 주거나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삶을 위로하고 꿈을 꾸게 한다.


  70년 대 중학시절 옆방에는 가난한 화가가 살았다. 시간이 나면 화가의 방을 드나들었다.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화보책자를 감상하기도 했다. 흑백 TV 시절이었기에 컬러도록은 나에게 최고의 인기 책자였다. 특히 르누아르의 누드그림은 사춘기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가끔씩 들려주는 화가의 그림 설명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그림을 친숙하게 보는 계기가 되었고, 딸아이가 미대를 진학하고부터는 마치 내가 화가 인양 그림을 대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현하고부터 대중가요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낯선 멜로디와 가사에서는 기존에 익숙했던 멜로디와 노랫말의 감흥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자연스럽게 클래식으로 취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직장을 옮기고 첫 월급을 받아 당시에 히트상품이었던 SONY社의 CD플레이어를 샀다. 휴일이면 음반가게를 들락거렸다. 가끔씩 폰 카라얀의 감수로 만들어진 산토리홀의 3층 싸구려 좌석에 앉아 타국의 외로움을 클래식으로 달랬다.


  예술은 두 번 태어난다고 한다. 첫 번째는 작가에 의해 창작되고, 두 번째는 관객에 의해 해석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관객이 전문가라면 비전문가인 나로서는 세 번째 관객이 된다. 부르주아가 아닌 내 삶의 마이너리티 안에서 갖는 예술의 음미는 내 삶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과 음악에 대해 세 번째 관객으로 느끼는 나의 예술을 이론과 비평이 아닌, 마이너리거 일상의 이야기로 써볼까 한다.  


우에노 모리 미술관 2016.12



커버사진 : 광주시향 정기연주회 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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