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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Aug 20. 2019

나의 페르소나

페르소나와 가식

  서울 출장길에 선배 지인을 만났다. 업체 미팅 시간에 맞춰 커피만 마시고 일어서려 했더니 아쉬움 가득한 지인의 한마디가 발길을 망설이게 한다. 


  '詩를 쓰는 사람이라 여유 있는 행동을 할 줄 알았더니 급한 성격은 여전하네!'


  당황한 나는 '제가 쓰는 것은 詩가 아니라 수필입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쏟고 말았다. 선배 지인에게는 죄송했고 카페를 나서면서 씁쓰레한 자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전의 이야기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40대에 이르러 처음 시골 초등학교 남녀 동창 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 어찌어찌하여 사회를 맡아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게 되었다. 모임이 끝나고 헤어지는 순간, 여자 동창이 나에게 다가와 한마디를 건넨다.


  '착실했던 영배가 사회에서 되바라져 버린 것 같구나.'


  다소 실망스러운 말투였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를 대신해서 옆에 있던 친구가 답변을 대신한다. 되바라진 것이 아니라 성격이 바뀌었다고 해야지, 라고 대답해줘 어색한 순간을 모면한 적이 있었다. 


  지인 중에도 나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수필 속의 점잖은(?) 김영배와 댓글 속의 장난기 많은 김영배에서 어느 쪽이 진정한 김영배냐고 물을 때가 있다. 그 지인은 내 수필보다 차라리 장난기 많은 댓글이 더 좋고 인간적이라 했다. 나에게 대놓고 말을 안 했을 따름이지 내 수필에서는 점잖게 보이려는 가식이 느껴진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 같았다.


  페르소나에 대해 생각해 본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라는 에세이에서 인간의 기본단위를 개인(個人)에서 분인(分人)으로 나누었다. 개인이라는 뜻의 individual에서 dividual(나누다)의 동사에 부정 접두사 in이 붙은 단어라고 했다.

  직역하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뜻인데 이 책의 저자는 부정 접두사 in을 떼어버리고 분인(分人)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선보였다.


  한 개인을 복수의 분인으로 쪼갠 예로, A를 만날 때의 나는 쾌활하고 즐겁다. B를 만날 때는 늘 진지하지만 만족스럽다. C를 만날 때는 왠지 긴장되고 어색하고 마음에 안 든다. 누가 진정한 나일까. 예를 든 모습의 모두가 나의 모습이다. 이게 분인으로서의 자신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럼 정체성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사전적 의미로는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이라고 한다. 즉, 수미일관 흔들리지 않는 ‘본래의 나’를 자신의 정체성(identity)으로 여긴다.

  하지만 ‘본래의 나’라는 것은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 놓여있다.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쓰고 ‘캐릭터’를 연기할 수밖에 없다. 흥겨운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고 중환자실에서 노래와 춤을 출 수 없으며, 과묵한 성격이라고 담소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진정한 나'와 '연기의 나'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


  '연기의 나'를 드러내고서 타인의 시선에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왜 불안할까. 그 불안에 대해 히라노 게이치로는 다음처럼 말했다.

우리는 타인이 내 본질을 규정하고 나를 왜소화 시키는 게 불안한 것이다.

  그렇다. 착실했던 사람이 되바라져 버린 것 같구나, 라는 동창의 말에 순간적으로 나는 왜소화의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분인으로서의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안이었을 것이다.


  최근 읽은 책 중에 남인숙 작가의 <사실,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에서 '사회성 버튼' 이야기가 나온다. 사회성 버튼 또한 페르소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자신의 성향대로만 살아갈 수 없다. 다만, 구분해야만 하는 게 있다.

  페르소나와 가식의 구분이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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