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잉, 위~잉’
아침부터 시끄러운 진동소리가 잠을 깨운다. 이불 밖을 더듬어 겨우 휴대폰을 쥔 후 발신자를 보니 엄마다.
‘아이~, 아침부터’
전화를 받자 엄마가 특유의 활기찬 음성으로 안부를 묻는다.
“아들~ 잘 잤어? 아침은 잘 챙겨 먹고 다니고?”
“엄마는 아침부터 무슨 전화를 하고 그래~, 안 그래도 출근 준비 때문에 빠듯한데”
자다 일어난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쳤다.
“미안 미안, 아침은 잘 챙겨 먹고 출근하는지 궁금해서 그랬지.”
직장인 5년 차, 이 정도면 걱정을 놓을 법도 한데, 엄마의 걱정과 잔소리는 끝이 없다.
이런 잔소리가 지겨우면서도,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줄 사람이 엄마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감사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자랑스러운 K-아들이기에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오히려 더 짜증을 낸다.
“걱정하지 마. 잘 챙겨 먹어! 엄마나 잘 챙겨 먹고 운동이랑 꼬박꼬박 해! 더 할 말 없지? 나 이제 준비하러 간다.”
급하게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엄마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응, 아들 오늘도 파이팅 하고~ 아 근데 너한테 무슨 편지가 하나 왔더라. 보내는 사람이 ‘장지희’?라고 적혀있네.”
“누구!?”
“지! 희!, 장지희! 어머, 아들, 엄마 친구한테 전화 온다. 출근 잘하구!”
뚝.
‘지희? 그 장지희?’
아침으로 간단하게 시리얼을 챙겨 먹고 출근길에 나섰다.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은 가야 했다. 버스가 도착하자 탑승해 뒤쪽 구석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덥던 여름이 가고 선선한 가을이 왔음을 모두에게 알리듯 은행나무들이 샛노란 빛깔로 대로변을 수놓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의 마음 또한 약간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지희. 대학교 때 만나 약 7년 간 연애했던, 내게 사랑의 시작과 끝을 긴 시간 동안 친절히 알려줬던 그녀. 우리는 3년 전에 헤어졌고, 이제는 헤어졌던 이유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큰 이벤트는 없었으리라. 빵빵했던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 천천히 흐지부지 헤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와 헤어진 후, 약간의 자유를 맛보다 서너 번의 연애를 했다. 유사한 이유로 두 번쯤 이별을 경험했을 때였나? 갑자기 연애가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가끔씩 ‘지희’가 생각나곤 했다.
그녀를 떠올리면 서로의 민낯을 아무렇지 않게 공유하던 순수함, 욕구를 숨기지 않고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던 자신감, 다소 다툼이 있더라도 이런저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솔직함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그런 와중 그녀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무슨 일로 편지를 보낸 걸까? 욕이라도 왕창 쓰여있는 걸까? 아니면 나처럼 추억 속의 우리가 그리워진 것일까?
연애할 때도 특별한 날이나 크게 다투었던 때면 우리 집으로 편지를 써주었던 그녀. 편지를 읽을 때마다 그녀의 진심에 감동했던 나였기에 더욱 편지 내용이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내릴 때가 되었다. 나는 급하게 엄마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내고는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을 향해 뛰었다.
‘나 이번 주 집에 가, 편지 절대 열어보지 말고 내 서랍에 넣어 놔 줘’
회사에 도착해 이전과 다름없이 일을 했다. 점심시간에는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는 야근을 했다. 화요일, 목요일은 거래처 회식이 잡혀 있던 터라 이틀간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매번 해왔던 대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뭔가 달랐나 보다.
보고하는 나를 보고 부장님은, “진우, 너 복권이라도 당첨됐냐? 왜 이렇게 쪼개?”
팀장님은, “너 요즘 들어 말대답 안 하고 고분고분하다?”
얼마 전 결혼한 김 주임은, “대리님, 여자 생기셨어요?”라고 내게 물었다.
너무도 느리게 흘러 ‘대체 언제 오나?’ 했던 금요일이 왔다. 주중에 열심히 일한 덕에 6시가 되자마자 빠르게 퇴근할 수 있었다. 곧장 버스터미널로 가 고속버스를 탔다.
집에 한 번 오라던 엄마의 말에 ‘알았다’ 고만 건성건성 답하다 보니 5개월 만에 가는 집이다.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짧지 않은 거리,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어제 회식으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을 청했다. 진부하게도 김동률의 노래들을, 그중에서도 ‘다시 시작해 보자’를 몇 번이나 들으며 센티함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종착지에 도착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터미널에서 15분 남짓 걸어 도착하는 부모님 댁은 엘리베이터가 바뀌어 있다. 번쩍번쩍한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을 바라보니 상기된 얼굴에 약간은 나이 들어버린 청년이 보였다.
“13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마주한 현관문. 오래간만에 가서인지 도어록 비밀번호가 잘 기억나지 않아 초인종을 눌렀다.
“엄마, 나!”
이윽고 현관문이 열렸고 나를 반기러 나온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아이구~ 아들! 진짜 오랜만에 보네. 어여 들어와 돼지고기 잔뜩 넣고 김치찌개 해 놨어”
엄마와의 포옹 후 집으로 들어가자 TV를 보고 계신 아버지가 보였다.
“아빠, 저 왔어요”
“왔냐?”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는 제일 먼저 서랍부터 열었다. 엄마가 말했던 지희의 편지가 보였다. 손을 뻗으려는데 바깥에서 엄마가 소리쳤다.
“아들~ 얼른 나와서 저녁 먹어~”
평소였으면 알았다고 짜증을 내며 곧장 편지를 뜯어보았겠지만, 이상하게도 뜸을 좀 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식탁으로 가 앉았다.
오랜만의 방문이어서였을까?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외에도 잡채와 우유를 넣은 계란찜을 준비했고,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TV를 보며 먹던 과일이 동이 나자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 녀석들이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다고 했더니 저녁에 맥주나 한잔하자고 한다. 알았다고 대충 답을 하고는 책상 앞으로 갔다.
서랍을 열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편지를 집었다. 꽤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을 법한데도 주소가 적힌 글씨체를 보니 지희의 글씨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편지 귀퉁이를 찢어나갔고 이윽고 빽빽하게 채워진 편지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조용히 심호흡하고 편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읽어나가지 않았을 즘 나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편지를 다 읽은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고,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급히 집을 나섰다.
“엄마, 나 오늘 늦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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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진우야. 나 네 여자친구 지희야.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자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너의 고집에 못 이겨 카페 테이블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어. 요즘 들어 이렇게 먼 미래에 발송되는 편지를 쓰는 게 유행이라나 뭐라나.
여하튼 막상 쓰려고 하니 조금 부끄럽네. 5년 후 우리는 여전히 지금처럼 서로를 사랑하며 잘 사귀고 있을까? 아니면 서로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을까? 진짜 궁금하다.
요즘 너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 집안 사정 때문에 졸업 시즌에 맞춰 취업을 하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상, 하반기 모두 최종 면접에서 탈락을 해버렸지 뭐야. 그것 때문인지 요즘 우리는 함께했던 5년 동안보다 더 많은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도 회사가 바빠 예전보다 너를 잘 배려해 주지 못하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고.
하지만 너무 걱정은 안 해. 느낌이지만 내년에는 네가 원하는 회사에 꼭 입사할 것 같거든. 내가 가장 옆에서 봐왔는데, 넌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고, 무엇보다 나란 여자와 사귀고 있는 능력 있는 남자잖아? ㅎㅎ
그러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얼른 취뽀해서, 여느 직장인 커플처럼 맛있는 것도 먹고, 해외여행도 함께 다니자.
5년이나 사귀어서 웬만한 건 다 해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나는 너랑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항상 기대가 된다? 어떤 특별한 걸 해서가 아니라 너란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들 자체가 너무 즐겁기 때문인 것 같아. 그러니 요즘 들어 다투는 건 우리가 앞으로 더 잘 지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나도 너를 더 이해하고 배려하도록 노력할게.
오버하지 말고 딱 한 장씩만 쓰자고 내가 말했는데, 막상 쓰다 보니 벌써 두 장이 다 돼가네.
내 남친 진우!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부족한 여자친구 항상 이해해 주고 배려해 줘서 고마워. 비록 이 편지는 5년 후에나 너한테 당도하겠지만, 여기에 눌러쓰는 내 바람은 지금부터 힘을 발휘해 우리의 관계, 내년 네 취업, 더 멀리 우리의 결혼(?)까지 영향을 미쳐 모두 잘 될 거니, 우리 걱정 말고 지금처럼 잘 사귀어나가자.
사랑해! 내 남자친구.
2019.10.15.
진우를 사랑하는 여자친구 지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