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라는 남자 - 3부(완결)

by CMOONS

P는 한참 걷더니 어느 원룸 앞에 멈춰 섰다.


그에 맞춰 나도 멈춰 섰다.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깊게 한 모금 빤 후 긴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봤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약간 놀란 눈을 한 P, 그걸 보고 씩 웃는 나.


헛웃음을 치며 담배를 피우는 P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미행한 거냐?"


"아뇨, 그냥 달 보고 걸은 건데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웃다가 함께 그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남자치곤 방은 제법 깨끗했다.


물건들은 대부분 잘 정돈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여느 남학생들과는 달리 싱크대가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조그만 상을 펴고 남은 맥주를 꺼내 들고는 홀짝이기 시작했다.


"선배 할 말 없어요?"


"없어."


"저 그럼 가요?"


"... 가지 마"


그 대답이 제법 귀엽고 마음에 들어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P를 바라봤을 때, 이미 그의 얼굴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맥주 때문에 축축해진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 입술에 포개어졌고, 우리는 그렇게 천천히 서로의 입술을 음미했다.


기분 좋게 입을 맞추는 중 무언가 차가운 것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옆구리에 닿았다.


나는 얼굴을 땠다.


P는 약간 당황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야기해 줄 거예요?"


"뭘?"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거."


P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고, 거칠한 손으로 부드럽게 나의 몸을 훑었다.


P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팔로 P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우리 둘의 몸은 천천히 가까워졌고, 나와 P는 천천히 서로를 느꼈다.


한참 후, 우리는 벌거벗은 채 이불 안에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말해봐요"


"..."


"어? 이러기예요?"


"잠깐 생각하고 있었어."


"생각 다하면 말해줘요"


달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P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는 아버지가 말아먹은 사업과 그것이 가족에게 미친 여파, 아직 학생인 두 명의 남동생과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여동생, 농사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P는 답답한 집안일을 잊기 위해 학교 일에 매진했고 효과는 꽤나 좋았다고 했다.


어머니의 긴급한 요청이 있기 전까지는...


빚쟁이들의 독촉을 혼자 감당하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었던 어머니는 P에게 전화를 걸었고, P는 나중에 빨리 채워놓겠다는 생각에 학생회비에 손을 댔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아챈 몇몇 임원들과 말다툼이 벌어졌고, 차마 가족의 일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 없었던 P는 자신이 얼른 돈을 채워 넣겠다고 약속하며 학교를 떠난 것이었다.


P는 여름방학 끄트머리부터 지금까지 고향으로 내려가 집안일을 돕고 막노동을 하며 보냈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어느 정도 금액이 정리됐고, 지금에서야 비로소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끝마칠 즘 P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안쓰러웠고 나의 마음을 적절히 자극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속 어딘가에 미세한 금이 가게 만들었다.


집을 떠난 후 잊고 살았던 짜증나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좀 더 있다 가라는 P의 말을 뒤로 한 채 그의 집을 나섰다.


취기는 온데간데없어졌고 그 어느 때보다 곧은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하늘을 보니 달이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또렷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이후 나는 학생회를 나가지 않았다.


P는 그 이후로 내게 몇 번 연락을 했지만 답은 하지 않았다.


마주치더라도 그냥 어색하게 웃고는 그를 지나쳤다.


얼마 후 P가 군대에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그가 전역을 했으며 학생회와 연결된 운동권에서 일한다더라, 호스트바에서 일한다더라는 이런저런 소문을 통해서만 듬성듬성 소식을 전해 들었다.


느지막이 복학을 했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남들 한 번씩 하는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졸업을 한 후 빠르게 취업을 했다.


직장을 다니며 연애 몇 번과 이별, 두 번의 승진을 하고 나니 세월은 훌쩍 흘러있었다.


어느새 30대 중반, 나는 사회에 제법 닳은 사람이 되어있었고, 어쩌다 보니 아직도 혼자였다.


좋은 사람을 만나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마음을 늘 한켠에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에 나오고 나니 그 바람을 이루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갈등이 생기면 그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 해보기도 전에 나 혹은 그의 입에서 나온 차갑고 가벼운 말들로 관계는 쉬이 끝이 났고, 그런 반복에 지쳐 어느 순간부터 새로 시작할 힘을 잃었던 것 같다.


어느 시점 이후로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딱 그만큼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마음속 아쉬움도 커져만 갔다.


오늘은 오랜만에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고리타분한 팀장과 후배들의 관계가 썩 좋지 못해 가운데 낀 내가 위아래를 오가며 분위기를 살려야 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2차에서 모두들 얼큰하게 취한 채 기분 좋게 파할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오늘따라 맑은 하늘에 커다랗게 뜬 보름달이 눈에 띄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두 뺨을 기분 좋게 스치자 묘해진 기분 탓에 평소에는 생각지 않았을 편맥을 사들고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맥주 하나를 까서 기분 좋게 한 모금 들이켜는데 갑자기 대학시절 P가 떠올랐다.


술을 마시고 내 품에서 눈물을 흘리던 P.


나는 왜 그때 그 어리고 안쓰럽던 남자를 조금 더 안아주지 못했을까?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그의 애원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매몰차게 집을 나서버린 걸까?


갑자기 P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다.


집안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자신도 가정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나의 아버지와 같이 살아가고 있을지, 아니면 그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 있을지.


어떤 선택을 했든 지금 만나면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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