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의리라고 불렀던 것

술친구

by CMOONS

'자~, 우리 우정 앞으로도 변치 말자! 위하여!!'


시원하게 소주잔을 부딪히고 입에 털어 넣는 남자들의 모습이 TV 속에 보인다. 그날 이후 그들은 술자리의 의리 덕분인지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배신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행동하다 끝내 감동의 결과를 만든 후 드라마를 마친다.


힘든 상황, 숯불구이 삼겹살, 소주 한 잔, 친구. 이것들이 만들어 낸 감성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대학 시절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일주일에 네 번 혹은 다섯 번, 정말 많을 때는 일주일 내내 마실 때도 있었다. 그런 연속적인 술자리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친구들 덕분이었다.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은 게 몇 가지 있었다.


하나, 술자리가 생각보다 즐겁다는 것. 둘,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말이 잘 나온다는 것. 셋, 시간이 잘 간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술자리에 매료되었던 나는 금세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그렇게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서는 '술을 제법 마시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던 나는 몇몇 술자리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을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되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자연스럽게 술자리의 시작을 그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후 해가 질 때쯤 만나 새벽 4시가 넘어서야 헤어지는 반복이 시작되었다. 그 친구들과 마시면 너무 많은 양의 술을 먹게 돼 이전처럼 일주일 내내 마시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의 양과 거기에 쓰이는 시간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늘어만 갔다.


전날 마신 술이 아직도 깨지 않은 상태로 만난 우리는 뜨거운 국물이나 바삭한 튀김 안주와 함께 또 술을 마셨다. 주종도 가리지 않았다. 계절이나 날씨에 맞춰 어떤 때는 막걸리, 어떤 때는 소주, 어떤 때는 맥주, 특별한 날에는 와인이나 위스키도 마셨다.


신기한 것은 술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약간의 어색함이 감도는데, 몇 잔 들어가고 나면 그렇게 분위기가 좋아지고 즐거움과 우정이 솟아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짠과 함께 원 샷을 몇 번 하고 나면 요즘 말로 완전 T인 인간도 극 F가 되었다.


자신들을 괴롭게 하는 일이나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시답잖은 농담들이 수없이 오갔고,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거나하게 취했을 쯤 우리는 노래방을 마지막으로 술자리를 파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저녁의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건 술자리뿐이었다.


그들도 그랬는지 하루는 내가, 하루는 다른 친구가, 또 다른 하루는 또 다른 친구가 술 한잔만 하자고 유혹했고, 우리는 그것을 '의리'라 포장하며 나가 술을 마셨다. 거기서 더 나아가 참석하지 않거나 속이 안 좋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이들은 우리들의 쿠사리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1, 2학년이 흘렀다. 3학년 때쯤엔 이전처럼 잦은 술자리까진 갖지 못했지만 그때 그 술친구들과 한 번 만날 때면 여전히 오후 4, 5시쯤 만나 새벽 4시나 5시가 돼서야 헤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진하게 마시고 나면 우리의 의리가 더 돈독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찐한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마냥 만족스러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4학년이 되었다.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기에 이전과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취업을 준비했던 술친구들은 그쯤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부족한 스펙을 쌓고 자소서를 내고 면접 준비를 하기 위해 컨디션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이전과 다름없이 마셔대는 친구들은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변화의 모습을 보였던 친구들은 빠르게 취업을 했지만, 함께 계속해서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계속해서 취업이 늦어졌다.


그럴 때면 나와 여전히 술자리를 하던 친구들은 씩씩대며 말했다.


"이 새끼들. 취업했다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 봐라. 의리 없는 새끼들."


"그니까. 취업 준비 할 때는 준비한다고 안 오고, 취업한 후에는 신입이라 바쁘다고 안 오고. 이 쉐끼들 진짜 의리 없네."


"야야. 냅둬. 어차피 그럴 놈들이었어. 짠이나 하고 우리 진짜 제대로 해서 그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고."


술이 가져다준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평소보다 유난히 세게 잔을 부딪힌 후 시원하게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정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했다.


"딩디리딩, 딩디리딩." "어, 해장하자고? 지금 몇 시인데?, 뭐 벌써 12시야?, 알았어 ㅇㅇ국밥집에서 보자."


다음 날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나는 12시가 넘은 시각 씻지도 않고 국밥집으로 향했다. 그곳엔 어제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던 친구들이 있었고, 우리는 해장을 하고 커피 한 잔을 하며 수다를 떨다 집으로 돌아왔다.


든든한 포만감과 함께 나른함이 몰려왔다. 누군가 커피를 마시고 낮잠을 자면 효과가 죽여준다는 말이 기억이 나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숙취 때문인지 잠이 솔솔 왔다.


"딩디리딩, 딩디리딩." "어, 저녁 먹자고? 지금 몇 시인데?, 뭐 벌써 5시야?, 알았어 ㅇㅇ반점에서 보자."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나 아직도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짬뽕에 소주를 한 잔 했다. 빈속이라 확 올라오는 술기운에 다시금 텐션이 올라왔다. 우리는 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크으~, 의리 있는 새끼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술친구들 중 대부분은 취업을 했고, 몇몇은 자영업을 하거나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 대학원 진학을 했다가 진로를 바꿨던 나도 취업을 했다.


그 사이 술친구들과 몇 번 만나 진한 우정의 시간들도 가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과 보내는 그 우정의 시간이 자꾸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진전 없는 대화만이 오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이야기하고 있었고, 끽해야 만나는 여자, 남자 이야기, 그것도 아니면 그냥 주식, 코인, 부동산, 부업과 같은 금전적 이야기들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만나 이것저것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게 어디냐는 생각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솔직히 사회에 나가 이렇게 편하게 술 한잔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취직한 회사에서 업무 스트레스와 계속되는 술자리로 나의 몸과 마음은 망가져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부어있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회사 건강검진 결과지에는 대장 용종과 고콜레스테롤로 스트레스 조절과 운동 및 식이요법 조절 필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서른도 되기 전인데.


그때쯤 우연히 읽게 된 건강 관련 기사에서 술이 1급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적당한 음주도 안전하지 않다는 WHO의 발표였다. 그동안 내가 '의리'와 '우정'이라 믿었던 것들의 실체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도 이전처럼 시원하게 술을 마시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모임에 잘 끼지 못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이건 아니다 싶어 친구들과 술집이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내보려 했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시간에는 다들 일정이 있었고, 막상 만나도 술 마실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야, 뭐 하러 만나? 그냥 한잔하면서 얘기하자."


"점심? 점심은 시간 안 되는데. 저녁에 소주나 한잔하지 뭐."


"등산? 야 너 무슨 꼰대야. 우리 나이에 무슨 등산.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술자리에선 술술 나오던 농담과 이야기들이 멀쩡한 상태에서는 이상하게 잘 나오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내려놓고 술을 마실 때면 다시금 옛날처럼 흥이 돋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건강이 무척 안 좋아졌다. 그렇게 된 데에는 술의 영향이 컸고, 결국 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리로 똘똘 뭉쳐있다고 믿었던 친구들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술 약속이 아닌 다른 약속을 잡아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그냥 술 한잔하면서 놀자는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점점 젊은 시절 나의 대부분을 보냈던 이들과 멀어져 갔다. 나의 소중한 시간, 에너지, 돈을 쏟아부었던 사람들과 멀어져 가는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술'이라는 공통분모가 사라지자 내가 가진 관계망은 너무도 쉽게 어그러졌고, 그 상실감을 마주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 아픈 과정이었다.


하지만 술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면 함께할 수 없는 친구들은 현실에선 큰 의미가 없었다. 단톡방에는 시간이 되는 이들끼리 갖는 술자리 사진이 가끔 올라왔고, 회사 일, 건강, 가족, 연애, 공부 등으로 그곳에 끼지 못하는 친구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리고 나도 어느 순간 그곳에 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나는 대체 왜 나의 젊음을 그들과 함께하는 것에 바쳤는가? 제정신으로는 미래나 꿈,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는 관계에 왜 그리 목을 메왔단 말인가? 후회감이 몰려왔다. 당시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의미 있는 것들에 썼다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공부나, 운동,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보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깨달은 이후 나는 더 이상 술기운이 만들어준 관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술과 저녁이 주는 감성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실제보다 그 자리를 미화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맨정신에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노력한다. 술은 관계가 좋은 이들과 함께할 때 곁들이는 촉매제 정도로만 맥주 한두 잔 정도를 즐길 뿐이다.


솔직히 아직도 나의 젊음을 그렇게 보내버린 것이 아쉽다. '의리'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지킨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맨정신의 고독을 견디지 못해 술잔 뒤로 숨었던 것뿐이라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술기운이 빌려준 가짜 용기가 아니라, 맨정신으로 고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진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술에 이어 후회라는 수렁 속에 빠져 살지 않기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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