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들여다보다_소울
사후세계가 아닌 사전세계에서 살고 있는 아기 영혼 22번은 '살고 싶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에서 태어나 인생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힘들기만 한데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 얘긴 줄 알았다.
솔직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필히 한 번쯤은 이미 태어나버린 22번이었던 적이 있으리라 짐작해본다. 남들은 삶의 원동력을 찾아 제 역할을 하며 굴러가는데, 나는 뭘 좋아하는지, 어떤 직업이 나의 운명인지, 내 삶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는 계속해서 고민한다.
요 기다란 영혼 조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꿈인 초등학교 음악교사다. 신년운세가 좋았던지 일하던 직장에서 정규직 전환과 선망하던 아티스트 테오도르의 재즈 밴드에 합류할 기회가 동시에 생겼다. 하지만 역시나 역시나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해외판 김첨지가 되어버리고 만 조. 느닷없이 하수구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고... 그 누구보다 '살고 싶은' 그는 사후세계를 잘못 탈출하여 사전세계로 와버린다.
살고 싶은 영혼과 살기 싫은 영혼을 붙여놓으면 당연히 전자가 후자에게 교훈을 줄 거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를 외쳐온 아기 영혼이 되려 열정맨 아저씨에게 영감을 준다. 가상공간에서 수천 년 동안 직업체험을 해왔지만 인생 불꽃 찾기에 실패한 22번은 실수로 떨어진 지구에서 말했다.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일지도 몰라, 나 잘 걷잖아.
"그건 그냥 사는 거지. 불꽃이 아니야." 조는 자신의 불꽃이 재즈라고 생각했다. 멋진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자 의미였다. 되고 싶은 게 없는 22번은 좌절하며 자기 비난에 빠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22번과 조를 동시에 이해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힘들어 죽겠는데, 하루하루 자기 계발에 힘쓴다. 꿈이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별 볼 일 없는 인생 같은 느낌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왜 그럴까? 22번과 조,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인생의 불꽃을 멋진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따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젊은 물고기: 바다라는 걸 찾는데요..
나이 든 물고기: 여기가 바다인데?
젊은 물고기:??? 이건 그냥 물인데? 제가 원하는 건 바다예요.
부활(?) 후 성공적인 재즈 연주를 마친 조가 이제 다음 단계는 무엇이냐고 물으며 공허해하자 테오도르가 해준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필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된 조는 퇴근 후 내일 또 출근해서 재즈 연주를 다시 하면 된다. 입시에, 취업에, 사업에 성공하면 인생이 완벽한 꽃밭이 될 줄 알았는데,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면 저녁 먹는다. 저마다 꿈꿔온 인생이 있는데, 사실 우리는 이미 인생 위에 있다.
수천 년 동안 지구행 불꽃 티켓을 얻지 못했던 22번은 단 한 번의 지구 방문으로 불꽃 칸을 채웠다. 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22번은 아직 삶의 목적을 못 찾았는데요?"라고 묻자 아기 영혼들을 돌보던 삼신할매 제리는 "그런 건 정해주지 않아요. 삶의 목적이니 의미니, 왜들 그러는지 원." 하고 대답한다. 불꽃은 목적이 아니었다.
지구에 불시착한 아기 영혼이 처음 경험했던 것은 감각이었다. 피자 냄새가 좋고 맛은 기가 막혔다. 사탕을 우물거리며 미용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지하철 환풍구 바람이 간지러웠고,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나뭇잎이 예뻤다. 나를 위해 옷을 꿰매 준 엄마(조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의 실타래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감각을 통해 세상을 온전히 경험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불꽃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야.
인생을 살 준비가 되면 마지막 칸은 채워져.
나는 취준생이다. 그리고 오늘 된장찌개를 먹었다. 보글보글 끓을 때부터 구수한 냄새가 났고, 호박이랑 두부가 부드럽고 국물은 시원했다. 아마 내가 취업을 해도 된장찌개를 먹을 거다. 그때도 된장찌개는 보글보글 끓으며 구수한 냄새가 날 거고, 호박이랑 두부는 부드럽고 국물은 시원할 거다. 그러면 한번 우리가 이렇게 한번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보자. 내가 오늘 먹은 된장찌개랑 취업하고 먹은 된장찌개는 다를까? 아마 똑같을 거다. 그걸 먹고 있는 나의 기분이 다른 거다.
그런데 취업을 하고 먹으면 된장찌개가 꿀맛이 될까? 취업 걱정에 된장찌개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면 그때는 해야 할 업무와 인간관계를 신경 쓰느라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그러면 이왕 먹을 거 취준생일 때도 맛있게 먹으면 좋지 않을까? 찌개는 그때나 지금이나 맛있을 텐데 말이다. 오감을 열고 매 순간을 즐기면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아도 살맛이 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마지막 불꽃 칸을 채워 지구에 태어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