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들여다보다_햄릿
인간들은 하나 같이 다 죄인이다. 인간의 본성인 욕망이 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죄가 된다. 맹세를 허물어버리는 인간의 변덕스럽고 간사한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심과 죄책감은 인간을 고뇌하고 불안하게 만들어주지만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인간은 그 고뇌 끝에 양심의 손을 놓아버리곤 한다. 결국 그것이 인간을 비극과 파멸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햄릿』의 이야기는 복수의 실마리로 시작한다. 억울한 죽음으로 유령이 된 햄릿 왕은 햄릿 왕자에게 클로디어스에 대한 복수를 부탁한다. 하지만 이때 유령은 어떤 방법으로 복수를 하든 간에 햄릿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고 당부한다. 따라서 햄릿은 복수를 하면서도 죄(sin)를 짓지 말아야 했다. 여기서부터 복수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이 때문에 그는 복수와 죄책감 사이를 위태롭게 왔다 갔다 하면서 심적으로 갈등한다. 가슴이 터질 듯 한 분노에 휩싸여도 바로 행동이나 말로 옮기지 않았고, 복수를 할 기회가 와도 더 좋은 방법과 때를 기다렸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그의 번뇌는 독자로 하여금 그와 함께 갈등하고 불안에 떨게 만든다.
이 위기감은 3막에서 극에 달하고, 흥분한 햄릿은 순식간에 레어티즈의 아버지이자 클로디어스의 간신인 폴로니어스를 살해하고 만다. 햄릿이 장막 뒤의 감시자를 클로디어스로 착각했건 폴로니어스인지 알았건 혹은 그게 누구든 상관하지 않았던 간에, 여기서 한 가지 명백한 것은 이로 인해 햄릿이 죄를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 결말의 죽음들보다 더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 그가 견뎌왔던 내적 갈등과 괴로움, 그리고 아버지 유령의 당부까지 모든 것을 이 한순간에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후에 그는 구더기의 식사를 이야기하며 죽음 앞에 삶의 허무함을 내비친다. 광대도, 변호사도, 삶을 살았던 모든 인간들은 해골이 되고 흙 속에서 구더기의 만찬이 되어 순환한다. 이 순환의 순리 앞에서 그동안 그가 해왔던 갈등은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걸 아는 사람이 어찌 클로디어스에게 복수를 하였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양심과 복수 사이에 끼어 있는 그의 고군분투는 삶 위에 머물러 있을 뻔했던 허무를 죽음으로 옮겨버린다. 다시 말해서 구더기의 순리가 그의 삶을 허무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3막에서 햄릿의 살인은 레어티즈를 햄릿과 같은 처지로 빠뜨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한 가지 교차점을 찾아낸다. 자신의 아버지(햄릿 왕과 폴로니어스)는 적에게 살해당하고 그 원수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거트루드와 오필리아)의 순결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때 햄릿은 들끓는 가슴과 반대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반면, 레어티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격분하여 복수를 실행에 옮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다르게 만든 것일까?
레어티즈는 복수를 하기 위해 왕에게 갔을 때 이렇게 말했다.
“충성 따윈 지옥으로! 맹세는 흑마 왕에게!
양심과 은총, 저 끝없이 깊은 구덩이로!
저주도 불사하리. 내 입장은 이렇다.
이승 저승 상관 않고 무슨 일이 닥치든지,
철두철미 아버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그 말이다.”
이와 달리 햄릿은 5막에서 자신의 부하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봐. 이 일은 그들이 자청했어.
그들은 조금도 내 양심에 꺼리지 않아.
그들의 파멸은 자기네가 참견한 결과야.
자네 생각엔 내가 이제 내 임무로서-
선왕을 시해하고 어머닐 더럽혔으며,
내 목숨을 노리고 그 따위 속임수로
낚시를 던진 놈을- 이 손으로 빚 갚음이
양심상 떳떳하지 않겠어?”
이를 보면 둘의 차이를 찾을 수 있다. 레어티즈는 복수를 위해서라면 양심 따위는 죽어버려도 상관없다. 그래서 그의 결심과 행동에는 어떠한 고민과 갈등도 배제한 확고함이 있었다. 하지만 햄릿은 그와 달랐다. 그는 양심을 살리려는 인간이다. 남편의 죽음을 그만 잊고 그의 동생과 결혼한 어머니의 양심과 본인의 양심이 딱딱하게 굳지 않고 부드럽게 뛰도록 노력했다. 이것이 비슷한 상황에서 햄릿이 레어티즈와 다른 양상을 보인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복수를 생각하는 햄릿에게 괴로운 갈등을 안겨 주었다.
레어티즈는 햄릿을, 햄릿은 왕과 레어티즈를 살해하였고 거트루드는 독배를 마셨다. 햄릿과 레어티즈의 복수가 모두 실현된 것이다. 복수의 딜레마는 이렇게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결국 모두가 죄의 외투를 입고 죽음을 맞이한 꼴과 같다. 이 죽음의 결말 앞에서 누군가는 비극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극이라 하기엔 그들에게 더 나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를 위한 그의 고뇌를 잘 들여다보았듯이, 햄릿은 복수를 하면서 마음을 더럽히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고로 햄릿과 레어티즈는 복수의 실현으로 인해 그들이 짊어지게 될 또 다른 죄를 죽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처럼 『햄릿』에 나오는 인간들은 하나 같이 다 죄인이다. 맹세를 허물어버리는 인간의 변덕스럽고 간사한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여기서 양심과 죄책감은 인간을 고민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햄릿 또한 그 고뇌 속에서 살인과 복수로 타락한다. 이는 단언 비극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양심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햄릿』이 결코 비극일 수만은 없다는 결론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