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싸이트 kimsight May 14. 2021

순수의 잔인함

문학을 들여다보다_폭풍의 언덕

인간의 이성은 선과 악을 구분할  알게 하며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시켜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 이전의 순수함은 무지하고 교양이 없으며 이기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것을 솔직하고 당당하며 사랑스러운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거다. 인간 본연의 순수는 아무런 티끌도 묻지 않았기에 그만큼 잔인하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자신보다  자신 같은 서로를 사랑한다.  둘은 교양이나 신앙과는 거리가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사랑 또한 이들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히스클리프의 캐서린에 대한 집착과 광기는 다분히 미친  같았고, 캐서린도  못지않게 이기적이었다.  둘의 사랑을 보고 ‘Annabel Lee'(Edgar Allen Poe)라는 시가 떠올랐는데,  둘은  속의 화자보다  열정적이고 광적이어서 그들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다.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그녀만을 사랑했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자기 곁에 있다고 믿으며 끝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녀를 그에게서 떼어놓은 자들은 그에게 악마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믿었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둘이 악마처럼 보이고 이들의 사랑은 훗날 심판을 받게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사랑이 다소 충격적이고 잔인하지만, 이를 비난하기보다는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성과 교양, 신앙과 거리가  사랑임은 분명 하나 이것을 아무런 꾸밈과 절제가 없고 야생과 가까운 인간 본연의 사랑이라고 바꾸어 말할  지 않을까? 아주 이기적이지만 솔직한  사람의 관계는 이성이 가로막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보다  자신인 나의 영혼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의 사랑은 순수함의 잔혹성을 일깨워주었다.  


히스클리프가 집을 나간 것은 캐서린이 그와 결혼하면 자신도 천박해질 거라는 말을 듣고서이다. 물론 상처가 되는 말인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이 없으면 살 수 없듯 캐서린 없이 살 수 없는 그가 그녀가 있는 집을 나온다는 것은 좀처럼 쉽게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히스클리프는 왜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걸까? 그가 부자가 되어 돌아온 후 캐서린의 가족들을 괴롭힌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복수를 위해 돌아왔다고 할 수는 없다. 부자가 되어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온 후에야 캐서린이 린턴과 결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분명 캐서린의 말은 히스클리프의 가슴을 찢어놓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캐서린과의 이별을 생각할 그가 아니니 아마 자신이 부자가 되어 캐서린을 천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걸 것이다. 만약 캐서린이 히스클리프가 돌아올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면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도 않는 이사벨라와 결혼한 것도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다른 여자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어 캐서린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솔 메이트를 독차지할 수 없게 된 이유와 그 방해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그때까진 캐서린이 죽을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결국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캐서린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자신의 곁에만 두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캐서린이 죽고 나서 그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린턴 가와 언쇼 가의 사람들을 괴롭혀 재산을 빼앗는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아무리 찾으려 해도 모습을 볼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와 그의 영혼에게 이러한 고통을 준 그녀의 가족들은 그에게 악마였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의 모습이 악마 그 자체였지만, 반대로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혼, 신과 같은 캐서린을 고통스럽게 하고 자신과 떨어뜨려놓은 그들이 악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악마를 벌하는 일은 그에게 기쁨이고 모르긴 몰라도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복수는 후대에까지 미치지 않았다. 그들을 괴롭히는데 더 이상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어턴과 캐시, 특히 헤어턴 언쇼가 그에게 악마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캐서린 언쇼를 빼닮은 헤어턴을 보면 히스클리프는 증오가 스며드는 것이 아님에도 괴로워한다. 자신의 실재를 느끼기 때문인데, 그 실재의 지각은 늘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영혼을 그와 떨어뜨려놓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쉽게 말해 캐서린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그를 헤어턴의 얼굴이 비웃고 있는 듯한 것이다. 이로 하여 그의 복수는 과거 잔인하게 들끓었을 때가 무색할 정도로 시름시름 시들어버렸다.  


캐서린 언쇼를 빼닮은 헤어턴과 그녀의 딸 캐시의 사랑으로 후세에서 비로소 복수가 끝이 나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고 기뻐할 수도 있다. 히스클리프도 이들에 대한 복수를 관두었으니 말이다. 그 또한 캐서린의 유령을 만나 함께 하게 되었으니 폭풍이 지나고 난 뒤 보는 더없이 깨끗하고 화창한 날씨 같은 결말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바라보면, 히스클리프에게는 결코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없다. 캐서린이 일찍 죽고 그가 캐서린을 고통으로 몰고 간 악마들(적어도 히스클리프의 입장에서는)과 싸우며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유령, 그의 영혼이 항상 그의 곁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캐서린 없는 삶의 지지대이자 원동력이었던 그 믿음이 캐서린과 자신을 쏙 빼닮은 헤어턴을 볼수록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그녀와 떨어진 자신의 존재를 실감하게 되었고, 이 깨달음은 그를 결국 미치게 하여 쓸쓸한 죽음으로 몰아버렸다. 잔인할 정도로 순수했던 사랑을 지키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복수를 했던 그의 결말은 무자비한 현실을 마주하고 더없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5년 전에 작성한 것이라 지금과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다음에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고 재작성하려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중에 못 볼지도 모르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