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땐 고마운 걸 생각해

by 리스바


희야, 결혼식 전날 밤에 쿨쿨 잘 자는 신부는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여태껏 신부가 늦잠 때문에 미용실에 늦게 갔다거나 결혼식에 늦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하지만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연과 사람과 상황들이 있으니 분명 어떤 신부는 숙면을 취하고 산뜻한 얼굴로 결혼식을 치렀을지도 몰라. 적어도 나는 그런 신부는 아니었지.


성격이 예민한 편이라 평소에도 조금만 때를 놓치거나 환경에 변화가 있으면 잠에 잘 못드는-오늘의 경우는 <그것이 알고 싶다> 본방을 보다가 잘 때를 놓친 거랄까-편이라 자연산 원료로 만들어진 수면보조제를 꾸준히 먹어 왔어. 그러나 결혼식 전날 밤은 수면보조제를 사발째 들이켜도 잠이 들 수 없었을 거야. 물론, 10ml 남짓 될까 한 수면보조제 1팩이 저렴한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이라 그렇게 들이킬 배짱도 없었지만.


설레서 잠이 오지 않는 건 아니었어. 20대 초부터 친구와 언니들의 결혼 준비를 도우며 예식장 투어, 드레스 투어, 스튜디오 촬영 등을 쫓아다녔기 때문에 나에게 결혼식은 워낙 익숙하면서도 지긋지긋하지만 잘 치러야 하는 좀 큰 규모의 행사였을 뿐이야. 직장에서 행사 관련된 업무도 많이 했었는데, 예식장이라는 전문 업체에 많은 부분 의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내가 기획하고 진행했어야 했던 행사보다 마음의 부담도 적었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누웠을 땐 저녁 9시도 되지 않았던 것 같아. 건넌방엔 TV를 더 보겠다던 아버지가 소리와 불빛 때문에 못 잘 거 같다는 나의 성화에 어머니와 함께 억지로 침대에 눕혀져 조용히 잠을 청하고, 나는 이불에 얼굴을 비벼대며 이리저리 뒤척이기 시작했지. 이래저래 잠들긴 텄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 상태라면 아마 새벽 4시쯤에 겨우 잠들겠지.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라, 무의식의 불면 경계경보를 무시하고 잠을 못 자고 있는 상황에 대해 분해한다거나 하진 않아. 여전히 날뛰는 뇌는 어쩔 수 없지만 다만 육체라도 쉬라고 대체로 가만히 눈을 감은채 온몸에 힘을 뺀 채 누워 있지.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생각들을 하나씩 잡아내곤 해. 이상하게도 밤에 뇌 속을 헤집고 다니는 생각들은 대체로 걱정과 슬픔 같은 부정적인 것들인 거 같아. 나로서는 싱긋이 웃을 수 있는 것들은 억지로 찾아내지 않는 한 힘들어. 그러다 보니 깊은 밤엔 부정적인 감정에 취하게 되는 것 같아서, 언제부턴가 그럴 땐 고마운 걸 생각하게 되었어. 고마운 사람, 고마운 일, 고마운 것들에 대해.


내일 예식장에 하객이 몇 명이나 올까, 벌써 이번 주에 열댓 명이 못 가게 돼서 미안하다고 연락이 왔는데 등등 부정적인 생각이 나의 의식을 완전히 가로채기 전에 나는 고마운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로 결심했어. 혹시 내가 걱정할 까 봐 참석이 어렵다고 미리 알려준 사람들부터 떠올렸지. 결혼식 당일에 못 온다고 할 수도 있는데, 아니면 그냥 굳이 연락하지 않고 결혼식 지나고 못 가서 미안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정말 미안해하며 연락해줬기에 고마웠어. 그리고 나의 결혼식에서 각각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생각났지. 결혼과 육아로 현업에서 은퇴한 지 수년이 되었음에도 오직 나 하나를 위해 일해 준 전직 웨딩플래너 친구, 스튜디오 촬영을 하지 않는다는 나를 위해 포토그래퍼인 남자 친구를 동원해 웨딩 촬영을 선물해주고 결혼식 스냅까지 촬영해준 동생과 사회자 섭외를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선뜻 자원한 동생, 동선 확인을 위해 예식장 답사를 가겠다고 열의를 보인-물론 그렇게까지 할 일 이 아니시라며 내가 말려서 답사는 이뤄지지 않았어- 주례 목사님, 맡길 친척이 없는 나를 위해 축의금을 받아주기로 한 교회 오빠와 동생, 드레스투어며 온갖 심부름을 다 하고도 내일 아침 일찍 또 내가 요청한 간식과 음료를 사들고 예식장 미용실로 올 친구들, 그리고 또 나를 위해 예식장까지 와줄 사람들... 이 밤이 오고, 내일을 맞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렇게 고마운 생각 하며, 눈물 흘리며,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느라 어느덧 밤은 자정을 향해 깊어져 가고 있었어. 이상하지. 한참을 울어도 고마운 것에 대한 눈물은 진이 빠지지 않아. 눈이 붓지 않을까 걱정할 틈이 없이, 따뜻한 추억이 따끈한 눈물로 흐르며 내 볼을 어루만져주는 기분이 들지.


마음이 한껏 뜨끈하게 부풀어 올라, 밤에만 누릴 수 있는 감성을 호기롭게 이용하기로 했어. 그래서 아직은 잠들지 않았을 것 같은 친구들과 동생들에게 메시지를 보냈지, 고맙다고. 그리고, 역시 미처 잠들지 못했던 그들에게 더 따뜻한 말을 받고 또 울었단다.


마지막은 여보에게 메시지를 보냈어. 무던한 편이라 어느 때고 어디에서든 잘 자는 여보이기에 잘 자고 있겠거니 했으나, 그도 역시 결혼식을 앞둔 신랑이었기에 잠들지 못했더라. 만남부터 지금까지와 내일과 내일 이후로도 함께할 모든 것에 고맙다고 적어 내려 간 나의 메시지에 그는 그의 성격다운 차분하고 진솔한 단어로 고마움과 사랑을 답해줬어. 그리고 서로 잠 좀 자라고 격려한 뒤 다시 눈을 감았지. 하지만 그 이후로도 기억 저 깊은 곳까지 찾아가 고마운 것들을 뒤적이다 새벽 몇 시쯤인가 스르르 잠이 들었단다.


다음날 결혼식은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잘 치렀어. 그래서 또 고마운 것들이 생겼지. 언젠가 다시 밤 잠 이루기 어려울 때, 울적함이 나를 엄습할 때,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 침잠되지 않기 위해 끄집어낼 수 있는 고마운 것들 말이야.


희야, 우리는 어느 때이고 울적해질 수 있단다.

호르몬이 농간을 부릴 수 있고, 육체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을 수도 있고, 나쁜 일 힘든 일 슬픈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걱정이 될 수 있고... 우리를 울적하게 만들 것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 네가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을 따라 우울의 깊은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뛰듯이 계단을 내려갔는데, 올라갈 길은 구만리처럼 느껴질 수 있어. 내려 간 속도만큼 다시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런 사람은 대체로 감정 기복이 심하지.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평가는 대체로 받고 싶어 하지 않잖아. 재촉하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너는 너의 우울에서 성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올라왔으면 좋겠어. 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것들을 단단히 발판 삼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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