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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Dec 15. 2021

우디앨런이 사랑한 스페인 도시, 오비에도


오비에도


 산탄데르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산티야마 델 마르(Santillama del mar)를 들렀다 오비에도(Oviedo)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 우디 앨런의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를 봐 둔 상태였다. 한국 제목으로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로 개봉된 이 영화는 주인공인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 여행을 떠났다 스페인 남자 후안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답게 바르셀로나의 풍경을 마치 여행을 떠난 것처럼 생생하게 낭만적으로 잘 보여주는데 재미있게도 영화를 보고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영화의 배경인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주인공들이 잠시 여행을 떠나는 오비에도였다. 우디 앨런이 사랑했다는 도시 오비에도는 도시 전체에 예술 조형품이 설치되어 있는 예술의 도시이자 산티아고 순례길 종착역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stela)에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오비에도 중앙 광장에 세워진 우디 앨런 동상



 오비에도에 대한 내 기대는 매우 컸다. 영화를 재밌게 본 데다 홀로 묵을 호텔방을 저렴한 가격에 예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만이 첨가된 영화 스크린 속 도시와 현실의 오비에도는 차이가 있었다. 대대적인 정비가 있는 것인지 대성당과 유명 건축물이 있는 거리 곳곳이 공사 중이어서 온전한 건축물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대를 하고 왔던 호텔이 문제였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 소개된 숙소는 오비에도 전통 가정집을 개조해서 호텔로 운영하고 있으며 청결함은 물론이고 친절한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처음에는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호텔 구조가 인상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체크인을 도와줬던 아들은 친절히 자신들이 이 건물에 같이 살고 있으므로 문제가 있으면 24시간 언제든 문을 두드리고 요청을 하라고 설명했다.


 한 층을 절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호텔로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가족이 살고 있었다. 가족이 사는 공간과 호텔은 문 하나로 구분되어 있었고 저녁이면 문 너머로 주방에서 호텔 주인 가족이 식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페인 가정집에서 머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만족하며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온 터라 지쳐 짐을 풀고 씻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악명 높은 베드 버그에 물린 것이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웠다. 불을 켜고 이불을 걷어보니 침대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어쩔 도리가 없어 가져왔던 수건들을 침대 위에 깔고 다시 잠을 청해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벌레에게 물린 자국이 늘어났고 물린 부위는 빨갛게 부어올랐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도움을 요청하러 리셉션에 가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24시간 문을 두드리라던 아들의 말이 떠올라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주인집의 문을 두드렸다. 호텔 주인이 잠이 덜 깬 채 나와 지금이 몇 시냐며 내게 화를 퍼부었다. 나는 늦은 시간에 미안하지만 벌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주인장은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며 내게 욕설을 내뱉은 후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스페인어를 알아듣는 것이 그때만큼 괴로운 적이 없었다. 그가 하는 욕을 다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방에 돌아와 의자에 앉으니 침대 위 하얀 시트에 벌레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으로 보였다. 그 침대 속에 다시 몸을 누일 자신이 없어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아 밤을 꼴딱 새웠다. 아침에 다시 프런트를 지키고 있는 아들에게 베드 버그가 이야기를 하니 우리 호텔은 베드 버그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방으로 데려와 침대 위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보여주니 내 짐에 딸려온 벌레가 아니냐며 어이없는 말을 내뱉는다. 일주일 넘게 여행하고 있지만 베드 버그로 고생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고 하니 소독을 하고 시트를 갈아주겠단다. 방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언성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비에도 대성당


 오비에도의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디 앨런 동상도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도 독재자 프랑코가 결혼식을 올렸다던 성당도 감흥이 없다. 온몸은 가렵기만 하고 몸이 무겁다. 호텔 근처 약국에 들러 연고를 하나 구입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약사에게 벌레 물린 자국을 보여주니 어디서 이렇게 되었냐며 친할아버지처럼 안타까워하신다. 서러운 마음에 호텔 침대에 벌레가 지나다니는데 주인이 방을 바꿔주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 약사는 호텔 이름을 묻고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가족인데 내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몹쓸 주인이라고 같이 욕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연고 하나를 주며 바르는 법과 피해야 할 음식 들을 짚어준다. 마지막으로 오비에도에서 즐겁게 보내다 가란 말을 덧붙이셨다.



 그 따뜻함에 피로와 얼었던 마음도 함께 풀리는 기분이다. 연고를 받아 들고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침대 시트를 갈고 소독약도 뿌렸다며 나에게 방을 다시 보여준다.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연고를 바른 후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또다시 온몸이 가렵다. 분명히 소독을 했다고 했는데 침대만 들어오면 가려운 것이 벌레가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날 밤도 그렇게 잠을 자지 못하고 결국 다음날 나는 새 숙소를 구해 방을 옮겼다. 그제야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프랑코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성당

 영화  오비에도는 새로운 사랑을 기대하게 하는 로맨틱한 도시였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느낀 오비에도는 피곤하고 지친 잿빛의 도시다. 여행지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최고의 여행지였어도 무례한 사람들을 만났다면 그곳이 나에게는 최악의 여행지가 된다. 우디 앨런은 오비에도에서 약국 약사 할아버지 같은 친절한 사람만 만났던 걸까. 그는 애초에 베드 버그가 진을 치는 저렴한 숙소에는 머물지 않았겠지.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  도시들은 그렇게 아름다웠겠지.




산티아고


 그렇게 잿빛 오비 애도와 작별을 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남들이 걸어서 가는 순례길을 나는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순례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에 순례자들처럼 감흥이 있지는 않았지만 여러 날을 배낭을 지고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과 같은 점이 있다면 베드 버그에 물린 지친 몸을 이끌고 산티아고에 왔다는 것이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슬레이터리아 광장


  대성당 바로 옆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호텔 1인실을 3만 원에 예약할 수 있었던 것은 연말이라 가능한 행운이었다. 창문을 열면 유명한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였다. 이 숙소의 주인은 젊은 여자였는데 체크인을 마친 내게 숙소를 떠나는 날까지 투숙객은 나밖에 없으며 자신도 연말을 보내기 위해 집에 가느라 카운터를 비울 것이라며 떠나는 날 열쇠를 문 앞 상자에 넣고 체크아웃을 하라고 했다. 대성당이 바로 보이는 호텔 전체를 혼자 사용하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도시는 그리 크지 않아 반나절이면 관광을 마칠 수 있었다. 사실 순례자가 아니면 크게 관광할 곳이 많지 않은 작은 도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 같은 이곳에서 경건하고 조용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는 화려한 바르셀로나에서 맞을 계획이다.

 



 스페인에서 지낸 한 해의 마지막을 산티아고에서 보내는 것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앉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올해는 많은 것에 감사해야 하는 연말이었다. 소원하던 대로 스페인에서 살게 되었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무사히 잘 지내고 있음에도 감사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며 마무리하게 된 것도 큰 축복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기도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순례자들이 감격에 겨워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무사히 순례길을 마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이었을까, 아니면 순례길을 마치고 맞이할 새해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비는 기도를 드린 것이었을까.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나도 순례자들 못지않게 감격에 차올랐다. 스페인에서의 삶은 비키나 크리스티나와 같은 격렬한 사랑의 햇빛 가득한 로맨틱 영화는 아니었지만 내가 주인공인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올해의 영화는 소소하고 여유로웠으며 즐거웠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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