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생각 나는 일
우두둑 우두둑.. 거리는소리에 잠을 깻다. 비가 오는 소리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을 내다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정말 비가오는구나. 오래 기다렸던 비가 오고 있다.
싼타바바라는 사막 지대여서 좀처럼 비가 오지 않는다. 우기인12 월부터 3 월까지 비가 조금 오다가 마는 편이다. 비가 자주 오지 않으니 자연히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그래서 비가 오면기분이 자연히 좋아 지게 된다.
비는 지붕과 나무 잎을 때리고,차 지붕을 세차게 때리며 내리고 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생각 나는 일이 있다.
오래 전에 뉴저지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일이다. 방을 같이 쓰고 있는 미국인 룸메이트(Roommate)의 집을 연휴를이용해서 가본적이 있다. 내가 살던 집은 2 층으로 큰 저택에 8 ~ 10 명 정도의 학생이 살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독방을 쓰고 어떤 아이는 룸메이트가 있어 학생의 수가 들쭉 날쭉 한다.
미국의 대학 생활은 낭만과 자유, 그리고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로 뒤 범벅이었던 것 같다. 집 주인은 50 대 후반인 아저씨였는데 부인이 없이 혼자 그 큰 저택에 산다. 집의 크기로 보아 예전에 재력이 있는 분 같았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다 성장해서 나 나갔고 부인이 죽었던지 이혼 했던지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혼자 산다 했다. 이 주인 아저씨는 대학생들에게 그의 집을 세를 놓고 있었는데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듯했다.
그 아저씨에게는 맥라이언에 못지 않게 예쁜 여자 친구가있었다. 그의 여자 친구는 9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이 좀 몸이 불편하고 좀 지능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소위 다운 증후군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는 다운 증후군을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많은 듯 했다. 엄마는그 아들 때문에 특수 교육을 공부 해서 그 때 당시에 특별 선생 (Special teacher) 로 일하고있었다.
그의 엄마가 그 아이에게 자신을 가지라고 근처에 있는 한국인 사범이 운영 하는 태권도 도장에 보내고 있었다. 이 아들은 누구를 만나면 자신이 태권도를 한다고 자랑 하며 발차기와 간단한 태권도 동작을 보여 주곤 했다. 그의 엄마가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어느 주말 나에게 자기 아들을 소개 시켜 주었다. 예외 없이 그 아들은 자기가 태권도를 배운다는 것을 과시 하기 위해서 발 차기며 여러 가지 동작을 보여 주었는데 영 동작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군 복무를 했던 특전사에서 거의 반 강제적으로 배운 태권도가 그때 까지만 해도 좀 살아 있어서 태권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내가 하는 발 차기며 태권도 폼이 그럴듯 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그아이를 만날 때마다 그 아이에게 태권도 폼을 몇 수 가르쳐 주고 자세를 바로 잡아 주었다. 그런데 그 일 이후로 그 아들은 주말만 되면 내가 있는 집으로 가자고 조른다고 했다.
집 주인의 여자 친구는 자신의 아들이 늘 맘에 걸리는 듯했다. 남자 아인데 아주 잘 생겼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약한 다운 증후군 아이들은 겉 모습이 그리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그 아들은 다른사람의 말은 잘 안 들어도 내가 뭐라고 하면 이상하게 말을 잘 들었다. 사범이 한국 사람이고 늘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기에 한국인인 나를 보고 비슷한 느낌을 가졌을 것 같다. 그 당시 태권도는 오늘 날의 한류 못지 않은 국위 선양에 큰 기여 했다고 본다.
주인의 여자 친구가 나를 잘 대해 주자 집 주인도 나를 극진하게 대해 주었다. 하루는 집 주인이 와이어를 자르는 도구를 가지고 뭔가 하려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데 엄두가 나지를 않는 모양이다.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한 손은 머리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대고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지하실에 얽혀 있는 전기 배선이 오래 되어 서로 엉켜 붙어 있었고 합선의 위험이 있는 듯 해 보였고 그것을 정리 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기계와 전기는 좀 다룰 줄 알아 해 주겠다고 했더니 정말 할 줄 아는가라고 한다. 내가 전공이 전자공학 쪽이라고 하자 그럼 해 보라고 한다. 30 분 정도 걸려서 깨끗하게 정리를 해 주었더니 너무 좋아한다. 배선 하는 일 자체는 별개 아니었는데 지하실 구석에 있는 일이어서 먼지와 거미줄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좀 힘들었지만 나는 결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하실 같이 은패된 곳에서 작업을 할 때는 독거미들이 있을 수 있어서 일정한 안전 처리를 하고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덤비는 때였기에 그냥 그 먼지 투성이의 지하에 들어 갔다. 죽으면 죽으리라 였다. 정말 무식한 사람은 못 말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 때 내가 그랬다.
그 때만 해도 제대 직후라 특전사의 모또가 늘 머리속에 있었다 - "안 되면 되게 하라." 한국의 청년들은 가장 아름 다운 나이에 그들의 청년 시간을 국가게 바친다. 정말 지옥 같던 군 복무 경험이 사회에 나오니 정말 금 같은 교훈과 경험이 되더라. 미국 아이들은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해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아니면 불평을 했던 것 같았지만, 나는 무엇을 먹어도 무슨일 을 해도 그냥 주어진 조건에 무척 고마워 했던거 같다. 사회에서 일하거나 공부 하는 일은 군 복무 할 때의 상황을 생각 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식은 죽 먹기였다. 돌이켜 보면 한국의 군 복무가 인생이 가장 아름 다운 시간을 빼앗가 가는 역 기능도 있지만, 역경을 헤쳐 나가는 강인한 정신력을 갖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순 기능도 있는 것 같다.
그 이후로 집 주인은 자기가 하기 힘든 일은 나에게 도움을 청했고 공부 하면서 바빠도 나는 마다 하지 않고 주인을 도와 주곤 해서 꽤 친해졌다. 주말에 점심 외식 할때는 나가기 전에 나에게 같이 점심을 하겠냐고 묻곤 했다. 이래서 주인과 그의 여자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3 명이 가끔이지만 같이 다니곤 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누군가 도움이 필요 할 때 나는 내가 처한 주제도 모르고 손을 내밀곤 했는데 그게 나에게 크게 작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내가 비록 영어도 잘 못하고 가진게 없고 경험도 없는 외국인 청년이었지만, 내 몸을 사리지 않고 솔선해서 뭔가를 도우려고 하는 태도는 집주인과 여자 친구에게는 꽤 괜찮은 청년으로 보였던 것 같다.
외국서 살면서 집주인이 나를 특별히 대해 주는 것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분들은 이해 하기 힘들거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거나 마찬가지다. 그 집에서 일어 나는 모든 행사에는 내 역할이 있었고 미국 학생 아이들도 그것을 자동적으로 인정 해 주고 있었다. 그 집 주인은 정말 여러가지로 나에게 잘 대해 주었고 그것이 낯선 미국에서 공부 하는 나에게는 적지 않은 위로가 되곤 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집세를 좀 줄이기 위해 그 대궐 같은 집으로부터 좀 집세가 싼 다른 하숙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이 기간동안 여름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았고 처음 차를 샀다. 내 인생의 처음 차를 사서 너무 좋았다. 나는 그 때 차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 가는지도 몰랐고, 차가 있으면 밖에 나가 매일 돌아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는 그런 사회 초보생 이었다. 다행히 큰 차 사고는 안 내서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지만 미국에서 공부 할 때 차 사는 거.... 좋게 생각해 주어서 필요 악 정도다.
그러나 그 때는 누가 뭐라고 말도 나는 차를 샀을 거다. 그 정도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차가 주는 자유와 독립성이 크게 작용했던거 같다. 하기야 그 때 여름 방학에 차를 타고 자기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코스타리카 까지 가보자고 꼬시던 놈들도 있었으니까. 그 때는 이 세상 전체가 내 꿈의 대상이 되었던 거 같다. 내가 실력만 있으면 이 세상 어느 곳에 가서 살 수도 있고 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항상 희망차게 했고 들뜨게 만들었다. 따듯한 기후를 좋아 하면 플로리다나 캘리포니아 쪽으로 가서 살면 되고 추운 기후와 스포츠를 좋아 하면 보스턴 쪽이나 뉴욕에 가서 일하면 되는 거였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처음에 하와이에 가서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휴가를 와서 몇 일 있다 가지만.... 그 곳에 365일 휴가를 보내며 산다고 생각 해 보라.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인데 그 집 주인은 어느 토요일 새벽 6 시경에 심장마비로 죽었단다. 이 집은 일종의 학생들 기숙사 같은 집인데 금요일 밤부터 학생들이 파티를 한다. 미국 아이들은 파티를 하면서 다른 친구도 만나고 스트레스도 풀고 그런다. 그러나 파티 하면서 먹고 마신 쓰레기가 어디를 보나 가득 이다.
주인은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어질러 놓은 싱크대에 식기들을 닦느라 달그락거린다. 부엌 바로 위가 내 방이어서 나는 주말 새벽이 되면 설거지 하는 소리에 깬다. 나는 기회가 될 때 마다 집주인을 도와 식기 세척을 한다. 내가 씻어 놓으면 주인은 타월로 말려서 찬장에 넣는다. 아무튼 나는 그런식으로 주인과 꽤 가깝게 지냈다. 꼭 내가 그래서 그렇게 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주인 아저씨의 여자 친구는 그렇게 말 했다. 내가 아침에 일찍 집주인을 도와 설거지를 하니 다른 학생들도 가끔 일찍 일어나 집주인을 도와 설거지를 한다고.
그가 죽은 것도 아침에 설거지 하다 죽었다 한다. 주중에는 학생들이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난다. 그러나 금요일 새벽 까지 술마시며 파티를 하고 늦게 잠든 학생들은 그날 새벽, 그가 부엌에 쓰러진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중에 학생들이 그를 발견 했을 때는 오전 8 시가 넘어서였고 그는 제대로 응급조처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주인의 여자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났는데 나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 남자 친구가 얼마나 외롭게 죽었는지를 말하며 그 주변에 그 집주인을 도와 줄 누군가가 있었어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한다. 내가집주인 근처에 있었더라면 집주인은 죽지 않았을 거라며 흐느낀다. 나에게 정말 잘 해 준 분이었는데…. 그집에 살 때 가끔 내가 토요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 싱크대에 식기들을 주인과 같이 씻곤 했기 때문에 내가 있기만 했어도 그 집주인이 심장마비에 걸렸을 때 그렇게 죽지는않았을 거라는 뜻으로 말하는 듯해서 더 내 마음이 아파 왔다.
나에게 그렇게 잘 해 주던 아저씨 였는데... 사람이 저렇게 허무하게 죽는구나. 지금도 내가 그 집에 들어 가면 "헤이! 샘. 훳츠 해프닝 맨" 하고 큰 허그를 해 줄 것 같은데... 그냥 죽는구나. 저 큰 저택 같은 집을 놔 두고... 좋은 차, 적지 않은 저금통장을 놔 두고 그냥 가는 구나... 이 당시는 나이가 어려 죽음에 관한 개념이 적었다. 그리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냥 곧 잊게 되었다. 죽음은 그냥 기분이 나쁜 거니까 생각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 좀 더 죽음과 시간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주말과 국경일이 끼어서 3 일정도의 긴 주말이 생겼다. 뉴저지의 계절은 한국과 비슷하다. 특히 봄이 되면 어딘가 가지 않으면 몸살이 날 정도로 싱그럽다. 정말 훈훈 하면서도 신선한 공기, 맑은 햇살, 푸른 나무 잎, 꽃 사이를 다니는 나비와 벌들, 흰 구름, 한적하게 나오는 팝송 노래들.... 어떻게 그냥 집에 앉아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나와 나의 룸메이트 그리고 다른 방에 있는다른 친구와 그의 여자 친구 이렇게 4 명이 로드 아일런드에 있는 나의 룸메이트 집을 방문 하기로 했다.
내 친구는 집에 전화를 했고 친구의 부모님들이 허락을 해서 우리 4 명 일행은 간단한 준비를 하고 떠나게 되었다. 사실 내 룸메이트가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잠시 집에 갔다 오겠다 하여 우리가 따라 붙은 경우였다. 아침 10 시 정도에떠나기로 약속을 했다. 떠나기로 약속된 날 남자 셋은 10 시정각에 모였다. 다른 친구의 여자 친구 바니(Bonny)가 뭘 하는지 2 층 그녀의 방에서 통 내려 오지를 않는다.
하루 자고 곧 돌아 올 여행인데 왜 여자 아이들은 그렇게 많은 것이준비 하는 지를 모를 정도로 가방을 몇 개씩 준비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왜 여자들이 그렇게 꾸물럭거리는 지를 좀 이해를 하지만 그때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바니가 화장을 예쁘게 하고 나타났다. (아니 보통 때 입는 대로 진(Jean) 에다가 셔츠(Shirt) 하나 걸치고 그냥 세수만 하고 나와도 내가 보기에는 참 예쁘더만 ...) 옷도 신경을 써서 입었고 머리도 손질을 한 것 같다.
(아니 저 애가 지금 자기 시아버지 될 사람 만나러 가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나와 내 룸메이트는 눈을 치켜 뜨며 바니가 왜 그러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 소리 않고 그냥 넘어 갔다. 처음에는 바니를 거의 한 시간 정도 기다리느라고라고 서로 좀 서먹한 기분이 되었지만 차를 타고 떠나자 그런 기분은 금방 사라졌다. 한 동안 차가 달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오랜만에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니 마음이 설레었다.
로드아일랜드까지는 뉴저지에서 약 4 ~5 시간 정도 걸린다. 보통 교통량에 따라 시간이 가감 되는데 이번에는 특히 국경일이 낀 긴 주말이어서 교통이 얼마나 밀릴지 예측 불허였고 그런 이유 때문에 나름대로 일찍떠 나기로 했던 것인데 바니 때문에 늦게 떠나 게 되었다.
어느 정도 갔을 때 이 때 예쁘게 화장을 하고 온 바니가 자기가준비해온 가방을 뒤적이며 과자며 과일을 꺼내서 이 남자 세 명을 챙기기 시작 한다.
(처음에는 늦게 나와서 왜 저렇게 이기 주의적일까 하는 생각으로속으로 핀잔을 주던 바니 였는데 지금 보니 완전히 미인 천사로 보이네..... 자기 보이프랜드는 물론 우리 것까지 준비 하느라고 그렇게 늦었구나? 여자는 좀 저런 맛이 있어야 돼... 알 것 같으면서 모를 것 같구.. 모를 것 같으면서도 알 수있는 뭐 그런 것 있잖어..)
이 멍청한 남자 셋이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이 천사에게 완전히녹았던 같다. 남자는 내가 봐도 참 멍청해. 그 사이에 이여자 아이한테 홀딱 넘어가는 것 보면 말야...
그러나 저러나 하나님! 여자를창조 하시기를 잘 하셨습니다. 여자가 있으니 그래도 이나마 목이라도 축이고 과자 부스러기 라도 얻어먹지 이 멍청한 남자 3 명만 출발 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자기 잘 낫다고 헛소리들만 하고 있었겠지요. 여자 없으면 정말 하나도 재미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바니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을 매우 감사 합니다.
친구네 집은 로드 아일랜드 주에 있었다. 뉴저지 하이웨이를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차가 이상 하게 느껴졌다. 속력이 제대로 나지를 않을 뿐더러 차 앞에서 흰 연기가 나는 것 같다. 내 룸메이트가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차를 도로 옆으로 세우더니 차의 내부를 살피고 우리에게 와서. 래디에터(Radiator) 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보고 한다.
하이웨이에서 나와서 근처의 개스 스테이션 (Gas Station)은 쉽게 찾았다. 자동차 정비 하는 분이 우리에게어디를 가려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 로드 아일랜드라고 하니 이 상태로는 위험 하니 좀 기다려서 고치고가라고 한다. 조금이면 된다던 수리가 거의 2 시간 이상이나기다려서 겨우 되었으나 완전하게 된 것은 아니고 겨우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된 것 같다. 긴 주말이어서인지 일하는 정비사가 다 일 하고 있지는 아닌 듯했다.
라디에터가 터졌는데 그것을 임시로 메우고 물을 부어서 고쳤다고한 것 같다. 메캐닉(Mechanic)은 천천히 쉬면서 가란다. 일단 시작한 여행이고 친구네 집 있는데 까지만 가면 거기서 고칠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강행 했다. (무식한 사람들은 당 할 자가 없다고 했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무식하고 또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을 때는 그 자체가 낭만이요 도전 이었던것 같다.)
4 시간이면 도착 할 수 있었던 거리를 거의 12시간 이상 걸려서야 겨우 도착 할 수 있었다. 속력도 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하이웨이휴게소 마다 계속 쉬며 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이웨이 위에 차량은 더 많아졌다. 이것은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짜증스럽고 후회스런 여행이었다.
올라 가면서 계속해서 친구네 집에 전화를 해서 보고를 하고 있었기때문에 큰 걱정들은 하시지 않았으나 그 분들이 준비해 놓은 저녁은 못 먹게 되었다. 미국의 하이웨이는여행자들을 위해서 기본 시설은 다 되어 있었고 요기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식당은 여러 군데 있다. 하이웨이휴게소 식당에서 샌드위치(Sandwich)로 저녁을 때우고 친구 집에 도착 한 것은 거의 밤 12 시가 넘어서였다.
도착 하자 마자 간단히 친구의 부모님께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둥 방을 나누어 뿔뿔이 헤어졌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우리 일행은 눕자 마자 나가 떨어졌다.
새벽인 듯 했다. 밖에사람들의 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우두둑 우두둑 하는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나 밖을 보니 굵은 비가 오기시작 한다. 나는 대충 세수 등 몸을 정리 하고 친구들과 함께 사람들의 소리가 나는 부엌 쪽으로 갔다.
다른 방에서 잔 바니는 언제 일어났는지 일어나 몸 차림을 정돈하고 부엌에서 친구의 어머니가 준비하고 있는 아침 식사를 도와 주며 수다를 떨며 까르르 대고 있다.
(어떻게 여자들은 저렇게 쉽게 친해 질 수 있을까? 어느새 딸과 엄마가 애기 하는 것 같잖아? 아무튼 미국 사람들은천성적으로 사교적 이긴 해. 어제 일어났던 일을 보고 하고 있다. 허긴 어른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시면 좀 걱정을 하실걸.......)
우리가 부엌으로 가자 룸메이트가 우리를 소개 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를 마치 자기 아들처럼 반가워 하셨다.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를 오래 알아 왔던 사람들처럼 진한 허깅(Hugging)을 해 주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 하자 더 관심 있게 보셨다. 어제 오래 걱정하며기다렸는데 안전하게 와서 다행 이다는 뜻이 담겨 있는 듯 했다. 차 문제 때문에 정말 짜증스럽고 또위험했던 길 이었으나 음식 냄새가 나며 훈훈한 이 부엌에 들어오니 그 모든 짜증과 피곤이 다 가시는 것 같다. 역시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녀석이 냉장고를 뒤지며 이것 저것을 꺼내서 우리 남자들이 앉아 있는 식탁에 내 놓는다. 나는 부엌의 구조를 살피며 두리번거리다 식탁 옆에 나 있는 커다란 창을보는 순간 깜작 놀랐다. 이 집의구조는 맨 아래에 차고가 있고 그 위에 2 층 구조로 되어있어서 총3 층에 해당하는 커다란 집이었다.
나는 부엌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서 밖을 보고 내가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착각 했다. 창문을 통해서 보이는 잘 정돈된 정원과 푸른 색갈의 나무들, 색색으로 조화를이룬 아름 다운 꽃들, 비를 맞아 까맣게 보이는 아스팔트, 하얀색으로 예쁘게 칠해져 있는 건너 보이는 집........ 그 공간 사이에 긴 장대처럼 주룩 주룩 내리는비……. 너무나 너무나 평화스런 한 장면이었다.
내 룸메이트가 커피를 어떻게 먹겠는가 라고 묻을 때까지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 광경에 혼이 빠져 있었다. 나뿐 만 아니라 다른 친구 녀석도 창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 나와 같은 느낌인 듯 했다.
창 밖을 내다보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이 룸메이트가 수다쟁이 바니와 엄마 사이에 끼어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 어머니가 자기 아들의 말에 더 관심을 쏟는다.
다 큰 녀석이 갑자기 자기 집에 오니까 엄마한테 어리광을 부리고싶어 졌나? 얼핏 보니 그 친구의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을 물 묻은 손으로 머리에 무엇이 묻었다고 떼어내는시늉을 하신다. 처음에는 좀 싱겁게생각이 들었다. 곧 이어 나는 친구 엄마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저럴까 하는생각을 해 본다. 내가 보기에는 그 녀석 머리에 묻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먼 ...
아들의 얼굴을 연상 바라보시는 친구의 어머니를 보니 갑자기 한국에 두고 온 식구들과 한국 생각이 난다.
한국의 우리 집에서는 여기처럼 부엌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안방에서 밥을 먹는다. 안방에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는 또 이렇게 수다를 떠들면 안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따뜻한 안에서 비오는 밖을 보고 있지만 한국에 있을 땐 무엇보다도 비가 오면 우산 가지고 버스를 타고여기 저기를 다닐 일이 여간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달랐으나 그러나 나에게도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내가 보기엔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을 리가 없는데 나의 어머니도 가끔 나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고하시며 떼어 내셨다. 그 어머니의손은 아들이 차가워 할까 봐 밤잠을 거르시고 일어나 마른 기저귀를 채우시던 손이다.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씻기시던 손, 새벽에 일어나 밥 하시며 도시락을 싸시던 손, 추운겨울 날에도 버스 정류장에서 아들을 기다리다 맞아 주던 따뜻한 손.
이제 그 아들은 성장해서 세수를 시킬 필요도, 도시락도 준비 하지 않아도 되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 아들은 멋있는 청년으로 성장 했지만 마치 자기 혼자 성장 한 것처럼 그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이 자기 몸에 닿은 것을 쑥스러워 한다.
그 어머니의 손이 다 성장한 아들에게 한가지 할 수 있는 것은얼굴에 묻은 것을 떨어 내는 일뿐이다. 그래서 다 성장한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자꾸 자식의 얼굴에검불 같은 것이 묻은 것으로 보이게 하는가 보다.
"어머니…......."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러 본다.
아 한국에 두고 온 어머니가 보고 싶다. 이제 다 성장 했다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던 그 아들은 마음속으로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지만 그 어머니의 기억에는 그 아들이 어머니의 손을 뿌리쳐 본적이 한번도 없다. 어머니는 아들의 어떤 잘 못도 기억하지 않고 계시다. 그 아들의 어머니는 늘 공부 잘 하는 아들로, 세상에서 가장 잘 난 아들로, 한번도 부모의 마음으로 아프게 한 적이 없는 착한 아들로만 기억 하신다.
"어머니...!", , “Mom!", "Mama!"...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이 얼마나 포근한 이름인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이름 중에이 보다 아름다운 이름이 있을까? 문화가 다르고 인종이 달라도 시대가 달라도 자식을 가진 어머니의 마음은다 똑 같은 것을 누군들 부정 할 수 있을까? 모든 여성이 언젠가는 어머니이며 그래서 여자들은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도 저렇게 쉽게 친해 지는 것일까?
은은한 커피 향이 부엌을 온통 덮고 있었다. 친구의 어머니가 아침 식사를 준비 하느라 달 그락 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온다. 자식을 향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주는 어머니의 사랑, 그 수다쟁이 바니가 친구의 엄마와 나누는 수다 소리, 은은한 그 커피 향기, 푸른나무, 푸른 정원의 꽃들과 밖에 조용히 내리고 있는 비가 조화를 이루어 이처럼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때, 분명 나는 천국을 거니는 중이었다. 인생이 이처럼 아름답고 이처럼 멋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 이것이 평화라고 하는것 이구나.
이것이 평화라면 나는 그 평화를 오래 오래 간직 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죄 많은 세상의 현실이라면 이 죄 많은 세상에서라도 오래 오래 머물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있었다.
이 다음에 나도 이런 집을 지어야지...커다란 유리 창이 부엌에 달린 그런 집... 비가 오면 커피 잔을 이렇게 기울이며 창 밖을 내 다 보면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인생은 멋있게 한번 살아 볼만 하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집을 ....
+++
이렇게 지붕을 투투득 때리는 장대 같은 비가 오면 그때 그 생각이난다. 이것을 추억이라고 하나? 오래 전 일이나 그때 생각을하면 마음이 두근거리며 나도 모르게 기뻐진다. 마음이 흐믓해진다. 내가 학교를 다른 데로 옮기고 나서 소식이 끊긴 룸메이트와 그 녀석 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녀석들은 어디에 있을까? 죽고 못 살겠다고 그림자처럼 같이 붙어 다니느라고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시험 때가 되면 친구들에게 노트 빌려 달라고 난리를 쳤는데... 그 녀석들 둘이 결혼은 했을까?
태권도를 배우던 그 꼬마는 어찌 되었을까? 자신의 아들에게 잘 대해 주었다는 그 호의 하나 때문에 나를 볼 때 마다 뭔가를 챙겨 주려고 했던 꼬마의 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저택 같은 하숙집은 그대로 있을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로드 아일랜드의 친구네 그 집을 마음속으로 방문하곤 한다. 내 기억이 그 곳을 방문하면 나는 다시 그 부엌의 창문 가로 간다. 그 부엌에는 은은한 아침 커피 냄새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와, 수다쟁이 바니와 내 친구들이 있다.
비가 오는 아스팔트는 까맣게, 잔디는진한 초록색으로 돋보인다. 건너 보이는 집은 하얀 페인트로 단장 되어 있으며 창 밖에는 장대 같은 비가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걱정과 고민, 싸움과 질투도 없고, 어떤 모함이나 배신이나 거짓은 없다. 거기에는 오직 비 내리는 소리와 평화라는것 밖에는 없다.
이렇게 비가 오면 나의 마음은 은은한 기쁨으로 다시 두근거린다.
그때 느꼈던 평화를 다시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