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지영 May 04. 2021

오른다리에 내 머리카락을 묶은 강아지에게

7년 간 식구였던 앵두를 잊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 집엔 더이상 개가 없다.

7년 만이다.


앵두는 2014년 4월 8일에 태어났다. 6일일수도 있다. 앵두를 데려올 때 펫샵 사장이 알려줬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땐 펫샵에서 강아지를 데려오는 게 정말 최악의 행위라는 것도 몰랐다. 앵두를 보내고 나니 알겠다. 모르는 건 죄다. 


나는 앵두의 생일을 챙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2021년 올해 친구들 몇몇이 반려견 생일을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고 못내 미안해졌지만 이마저도 엄마한테 앵두 생일이 4월 6일이던가, 8일이던가, 라고 물어본 게 다다.


우리가 앵두를 키우게 된 발단은 막내 동생이었다. 엄마가 막내 동생 방 문을 열었더니 손바닥만한 프로도 인형이 동생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막내 동생의 행동이 못내 마음아팠던 엄마는 아빠를 설득했고, 나도 신이 나 거들었다. 정작 막내는 시큰둥했다.


6월의 어느 날, 나는 체크무늬 나시 원피스와 짧은 청바지를 입고 엄마를 따라 펫샵거리에 갔다. 그 땐 유기견 입양에도 무지할 때여서 선택지가 거기밖에 없었다. 펫샵에는 하얗고 꼬물거리는 몰티즈, 솜사탕처럼 복실거리는 포메라니안, 그리고 푸들이 주를 이뤘다. 우리는 거리를 쭉 걷다가 조금은 동떨어져있는 맞은편 펫샵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사실 그 때까지 딱히 마음에 드는 강아지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앵두를 만났다. 특이하게도 앵두는 혼자였다. 앞서 본 펫샵에는 적어도 가게 당 강아지가 세네마리는 있었는데 여기는 앵두만 남아 있었다. 그릇된 생각이지만 질병이 있다거나 등등 상품 가치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 짐작하기도 했다. 당시 앵두는 짙은 갈색의 굽실거리는 털을 가졌는데 너무 작아서 팔 다리 머리 몸통이 덜 뻗어나온... 마치 덩어리 같았다. 앞서 본 푸들과는 다르게 주둥이가 짧고 뭉툭했다. 예뻤다.


우리는 앵두에게 첫 눈에 반한 게 맞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심사숙고 하기 위해 다른 곳을 돌아본다고 했다(앞서 든 그릇된 생각 탓이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갈 때 딸 둘이 딸린 가족이 들어오며 스쳤다. 밖에 나온 우리가 거리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서로에게서 읽어낸 걱정은 아주 똑같은 것이었다. 푸들이 저 가족에게 가면 어떡하지? 그리고 우린 그 가족이 나가자마자 바로 들어가 앵두를 데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앵두에겐 그 두 가정 중 어디가 더 좋았을까, 이런 반문도 든다.


분양을 결정하자 펫샵 사장으로부터 건강에 하등 무쓸모한 로얄캐닌 사료와 물통을 받았다. 분리불안을 교육해야 한다는 이유로 울타리도 받고, 돔 형 집도 받았다. 지금 와서 이 펫샵 사장을 욕보이기엔 내가 더 강아지를 기를 자격이 없다. 물건을 챙기는 중 아빠가 와 앵두를 안았다. 아빠의 품에 안기니 더욱 모카빵 모양의 생명 덩어리 같았다. 의외로 아빠가 제일 좋아했다. 인터넷 썰처럼 말이다… 사실 강아지의 이름도 아빠가 총각 시절 인터넷에서 자주 쓰던 닉네임에서 파생된 거였다. 그러나 이후엔 눈이 앵두같아 앵두가 되었다고 통용됐다.


앵두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내 무릎에 앉았고, 지금까지도 건재한 엄마의 빨간 모닝을 타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 때부터 9월 쯤 될 때까지 3개월 간 나와 앵두는 그저 집에만 있었다. 인터넷에서 본 조악한 정보들 - 5차 접종이 끝나기 전까지는 밖에 데려가면 안된다 등등- 에 의지한 나는 혹여나 이 작고 보드라운 덩어리가 무언가에 감염되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날까 노심초사했다. 집 거실을 뱅뱅 돌았고 머리끈으로 놀아줬으며 낮잠을 재울 땐 배에 올렸다. 배에 얹히는 무게감이 좋았다. 내가 배를 부풀리면 앵두가 위로 올라갔고, 배를 꺼트리면 앵두가 내려가며 살풋 눈을 떴다. 태풍 왔다며 몸을 뱅글뱅글 돌려주는 장난을 치면 펄펄 뛰었다. 기운이 좋다며 웃었던 것 같다.


3개월 동안 앵두에게 내 손을 태우는 데는 완벽히 성공했지만, 사회성을 길러주는 데는 완벽히 실패했다. 앵두는 다른 강아지를 보면 무서워했다. 산책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거울을 보며 짖을 때면 앵두는 바보라며 놀리곤 했지만 사실 나는 이것이 두고두고 미안했다. 걔의 세상은 오롯이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이 아파트 안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면서 나는 앵두를 광안리에 데려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입만 산 보호자답게 결국 앵두를 광안리에 데려가진 못했다.


짧게나마 5개월 정도 앵두를 케어한 후엔 자취를 시작했다. 그 뒤론 한 달에 두 세번씩 본가에 가 앵두를 '만났다'. 나는 더 이상 앵두를 '돌보지' 않았다. 앵두에게 나는 이벤트성 만남이 됐다. 그 때부터 주 보호자도 엄마로 바뀌었다. 그러나 앵두는 어릴 때 품어준 보호자라고 날 꼬박꼬박 기억하고 맞아줬다. 참 기특했다. 눈이 정말 동그랗고 순했다. 그리고 반짝반짝 빛났다. 그 안에 내 모습이 비치는 게 좋았다.


지금 와 너무 슬픈 일은, 앵두가 아프기 시작한 2019년 10월 이전의 발랄한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6년과 2017년, 그러니까 3~4살 정도 된 앵두는 그야말로 미모도, 체력도 모두 전성기였다. 1살 쯤 중성화 수술을 했을 때 환부를 핥지 않아 깔대기를 엄청 빨리 뗐을 떼부터 보호자를 으쓱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미용을 하러 가면 얌전하고 이쁘다는 소리를 매일 들었고, 진해루에 데려가 2시간 씩 뜀박질을 하며 놀았다. 살도 찌지 않아 마르고 날씬했으며 전선을 물어뜯지도 사람 밥을 크게 탐내지도 않았다. 신나게 놀 땐 본인의 흥이 주체되지 않아 내 손가락을 물기도 했는데, 그럴 때 내가 아야! 하면 바로 핥아주는 순둥이, 선한 강아지였다. 어딜 가든 그런 이야길 들었다.


다만 앵두는 한 가지 난감한 버릇이 있었는데, 잠잘 때 꼭 사람과 같이 자길 원하면서 자는 자신을 건드리면 바로 으르렁거리면서 무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식구들이 고생 좀 했다. 나도 많이 물렸고 엄마도 많이 물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시기는 정말… 무언가 묘사를 하려는데 이 기억이 너무 희미하다. 어떻게 이럴수가. 햇수로는 5년 전일 뿐인데 너무 아득하다. 내가 많이 바빴던 탓일까? 대학생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빴을까?


이 시기의 앵두는 사랑도 정말 많이 받았다. 범내골 프렌빌이나 하단 주택에 데려가면 소영이와 신혜, 정민이가 밤새도록 물고 빨아줬다. 그 친구들에게는 아직도 너무 고맙다. 앵두는 나에게 자랑스러운 강아지였다. 비록 내가 학업과 나의 인생을 명분으로 앵두를 내 인생에서 후순위로 미뤄둘 때도 앵두는 그것을 섭섭해하거나, 본인도 나를 후순위로 미루는 법이 없었다. 앵두는 나에게 자랑스러운 반려견이지만, 앵두에게 나는 그닥 충실한 보호자가 아니었다.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6년동안 앵두는 건강했다. 건강했을 때가 기억이 잘 안나 나만 머리를 쥐어뜯을 뿐이다. 앵두는 삼촌이 방치한 포도를 먹고 혈액 검사를 했을 때도, 내 스폰지 귀마개를 삼켜 몸 안에서 그것이 자기 머리통만치나 부피가 커졌을 때도 용케 살아갔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모두 앵두의 생명력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2019년 10월, 내가 막 취직해 한창 서울에서 개고생을 할 때, 인생에 앵두의 이응도 없던 시절, 우리가 보호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앵두는 그 때 우리 곁을 떠날 첫 단추를 끼웠다.


앵두는 아빠와 둘째 동생이 먹고 방치해둔 감자탕 뼈다귀를 다 먹어버리고 쇼크 간질이 왔다. 병원에 데려가니 배에 돼지 뼈다귀가 가득했다고 엄마는 말했다. 앵두의 건강 악화, 이유는 명확했으나 사실 나는 이를 조금 외면하고 싶었다. 가족을 미워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도 알았고, 마음을 날카롭게 벼려봤자 수습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차오르는 분노와 원망에 마취제를 놓고 또 놓았다. 마취제는 앵두에 대한 무관심으로 전염되기도 했다.


앵두는 이 때부터 바보가 되어갔다. 너무 독한 약을 먹인 탓이다. 뇌압을 낮추는 약을 하루에 두 번씩 시간 맞춰 먹이지 않으면 주기적으로 간질이 왔다. 나도 그것을 목격한 적 있다. 아마 앵두가 이틀 입원했던 2019년 11월이었을거다. 구석으로 처박히며 비명을 지르고 자빠지려하길래 급하게 병원에 데려가 입원시켰다. 그 때 정민이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앵두가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내서 앵두 달래랴 기사에게 사과하랴 고생했다.


그런데 엄마와 나의 사진첩에는 각각 앵두와 나의 셀카 10월 29일, 앵두의 간질 입원 내역을 안내하는 동물 병원 카톡 캡처 11월 6일, 그리고 앵두의 간질 현상을 촬영해둔 동영상 11월 19일 이렇게 있다. 언제가 진짜일까? 이것조차 희미하다. 강아지가 아픈데 체계적으로 기록해둔 것이 하나도 없다.


여하튼 그 때 앵두는 안락사 권유까지 받았지만 용케 살았다. 그 때 이후로 엄마에게 종종 앵두가 아팠다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또는 뒤늦게 접해듣고 애타했다. 문제는 이게 내 행동의 전부였다는 거다. 애타하기만 했다. 애타하기만. 발만 굴러다대 엄마의 '지금은 괜찮아졌다'라는 말에 바보같이 안심했다. '지금은'이라는 말이 내 게으름의 정당성을 담보한다는 듯이. 사실 '지금은'이야말로 등골이 서늘한 한정사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사랑에 게으름을 피운 게 맞았다.


앵두는 갈수록 눈빛이 맹해지고 발을 헛디뎠으며 장난감을 갖고 놀지 않았다. 어리광도 잦아졌다.    이상 자신의 몸을 건든다고 물거나 짖지 않았다. 아무리 건드려도 그냥 나를 쳐다봤다. 빤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생각의 결은 나를 향한 애정으로 모아지는  동그란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쁜데  안타까웠다.  총명하던 아이가.


고집은 식탐으로 옮겨갔다. 앵두는 호리호리하고 다리가 길어 사람 보기에 늠름하고 늘씬한 체형이었다. 다른 개들 그렇듯 간식은 좋아했으나 밥은 죽어라 안 먹어 걱정할 때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간질 발작이 시작되고 뇌압을 조절하는 약을 먹기 시작한뒤로 살이 찌고 식욕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3키로였던 호리호리 앵두는 2달 만에 5키로를 넘어버렸고, 본인도 제 몸이 익숙치 않은지 헥헥대고 뒤뚱거렸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 그 모습에 사실 많이 울었다.


우리 집은 리모델링 이전엔 절대 가구를 들이지 않는다는 아빠의 고집에 따라 앉은뱅이 식탁을 쓰는데, 앵두가 밥상에 참견하고 싶어 달려드는 바람에 끼니마다 전쟁이었다고 한다. 내가 가끔 집에 가 밥을 먹으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특히 고기를 구워먹거나 하는 날에 앵두는 그야말로 이성을 잃었다. 약 기운에 그러는 걸 알아서 모질게 내칠 수가 없었다. 얘도 지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닐텐데, 제정신이 아닐텐데, 가슴이 캔처럼 찌그러지는 느낌이었다.


2020년 후반부가 되어갈수록 앵두의 발작은 잦아졌다. 엄마는 자다가도 앵두의 낌새를 눈치채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엄마는 마음이 아파 앵두를 직접 달래진 못하고 늘 아빠를 깨워 앵두를 안겼다. 아빠는 늘 똥오줌을 지리는 앵두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약을 먹였다. 사실 앵두는 아빠의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와 내가 있으면 아빠를 거들떠도 안봤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악다구니를 쓰며 대드는 것도 아빠에게만이었다. 그래도 아빠는 묵묵히 앵두의 똥오줌을 받고 눈이 뒤집어지는 앵두에게 약을 먹였다. 그러다가 잠잠해지면 ‘거 봐라, 병원 안 가도 내가 안으면 된다’라고 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앵두에겐 사랑도 필요했고, 치료도 필요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행동이 괴로운 건 무작정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는 거다.


2021년,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또는 한 달 반에 한 번 씩 내려가 앵두를 예뻐해주고 올라오기를 반복하며 비행기 안에서 문득 ‘앵두가 정말 아프면 회사를 때려쳐야할까’라고 생각하던 그 때,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 씁쓸한 표정으로 ‘앵두 잘못되면 내가 많이 후회할거야’라며 은은한 죄책감을 툭툭 전시하고 말던 그 때.


앵두는 내가 회사를 관둘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회사 잘 다니며 자신에게 신경쓰지 않고 잘 살아가길 원했던 걸까?


5월 3일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5월 2일 저녁이었다. 나는 그 때 1일에 뮤지컬을 보고 2일에 자전거를 타고 친구 집에 가는, 그야말로 놀기에 집중한 주말 일정을 소화한 탓에 기절 직전이었다. 2일 밤 11시쯤 엄마에게서 의미심장한 카톡이 왔다. ‘뭐해?’ 나는 그냥 잔다고 얘기했고,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그것이 그냥 엄마가 혼자 누워 있다 센치해진 탓인줄로 알았다.


그리고 다음날인 3일 월요일 아침, 엄마가 전화를 달라고 했다. 나는 또 그걸 까먹었다. 이후 11시쯤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너무 놀라지 마, 라는 말을 듣자마자 앵두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고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때까진 괜찮았다. 앵두는 간질병이 걸렸고 뇌압이 문제니까 입원해서 조절하면 그 때처럼 살 수도 있겠지. 이건 백 퍼센트 그냥 나의 희망사항인데도 그걸 믿었다 바보같이.


원장은 내가 서울에 있더라도 오늘 내려오는 게 좋겠다는 소견을 전했다. 폐렴이 너무 심해 숨을 잘 못 쉰다는 진단이었다. 간질병이 있는 애에게 웬 폐렴인지 영문을 몰랐으나 눈물이 터져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팀장에게 강아지가 아프다고 밑밥을 깔아둔 게 잘 된 일인지 조퇴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케이티엑스를 타고 내려오는데 커피 한 잔 사들고 타는 게 그리 죄책감이 들었다. 문득 4월 9일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가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앵두 엄마가 보기엔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자주 와서 사랑해줘." 나는 그 때도 그냥 알겠어, 하고 조금 아파하고 말았다. 남의 일처럼. 그렇게 생각해야지만 덜 아프니까.


기차를 타고 내려오며 강아지 장례 절차를 알아봤다. 강아지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마스크가 젖도록 울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설마 우리 강아지가’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걱정도 있었다. ‘만약에 우리 강아지가 5월 5일 연휴까지 차도가 없으면 그 뒤는 어떡하지? 올라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이런 생각은 왜 한 걸까? 아마 우리 앵두는 이런 내 마음을 읽고 서둘러 간 것 같다.


오후 4시 쯤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 가기 전 다이소에 들러 안경닦이와 안경통, 그리고 혹시나 모르니 앵두의 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잉크와 스케치북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엄마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그냥 병원으로 갔다. 3일 전에 엄마가 털을 밀어버렸다고 한 말처럼 앵두는 털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배가 조금 부풀어 있었으며, 무척 가쁘게 호흡하고 있었다. 내가 재작년 입원시켰을 땐 뇌압을 낮추는 링거만 맞았는데, 이번엔 아예 산소방이었다.


자꾸 눈물이 났다. 입원한 적이 2~3번 있었는데 그 때는 모두 울지 않았다. 왜 오늘만큼은 참을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앵두가 오래 못 살 것이라는 단서를 접해왔는데 이번엔 왜인지 남일처럼 대충 넘길 수가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엄마가 산소방 구멍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그걸 본 앵두가 힘겹게 일어나 손가락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나가고 싶다는 듯 앞발을 올렸다. 내가 앵두야, 부르자 날 쳐다보기도 했다. 손가락을 넣으니 아까처럼 냄새를 맡다가, 힘든지 주저앉아버렸다. 나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내내 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치료 받는 데 우리가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라며 내일 오자고 날 이끌었다. 그래도 엄마는 그 때 앵두에게 아낌없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누나 또 올게, 사랑해.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앵두는 5시간이 지난 9시 30분 쯤 세상을 떠났다.


면회가 끝난 후, 나는 그래도 숨 쉬고 있는 앵두를 보니 안심이 되어 밥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한숨 자던 중이었다. 혹시 몰라 옷은 입었으면서 렌즈는 빼고 잤다. 반은 방심했고 반은 긴장한 어중간한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엄마에게로 전화가 왔고 스피커폰에서는 앵두가 지금 심정지가 와서 바로 와주셔야 할 것 같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리던 와중에도 나는 안경을 벗고 렌즈를 꼈다. 안경 끼고 울면 불편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왜 그랬을까…


병원에 가던 길 라디오에서는 이선희의 ‘그 중에 그대를 만나’라는 노래가 나왔다. 포스코 아파트 앞에서 신호대기가 길게 걸려 그 노래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운명까진 / 바란적 없다 생각했는데 / 그대 하나 떠나간 내 하룬 이제 / 운명이 아님 채울 수 없소 /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어쩌면 또다시 만나 / 우리 사랑 운명이었다면


그리고 마지막 구절, '내가 너의 기적이었다면' 이를 듣는 순간 내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발이 벌벌 떨렸다. 앵두나 엄마가 죽는 꿈은 이전에도 몇 번 꿨다. 그 때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안심했는데, 지금은 꿈이라는 안전장치가 없었다. 나는 무엇으로 내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지 몰라 그저 울면서 계단을 뛰쳐올라갔다.


앵두는 나를 두 번 기다려주진 않았다.


4시의 또 올게, 라는 인사가 마지막이었다. 아마 앵두의 힘이 거기까지만 닿은 거겠지. 상자 안에 담긴 앵두는 정말로 자는 것처럼 평온했고, 심지어 몸이 따뜻했다. 그런데 눈을 뜨지 않았다. 내가 불러도 움직이지 않았고, 심장이 뛰지 않았다.


우는 나를 이끌고 진료실로 들어간 의사가 보여준 앵두의 속은 처참했다. 폐가 하얗게 됐는데 뭐가 왜 찼는지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나는 그 때 엄마가 너무 자책할까봐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징조가 없는 것일 수도 있나요"라고 물었고, 의사는 진실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폐가 반은 없어져도 숨 쉴 수 있는 것처럼 징조를 쉽게 파악하긴 힘듭니다"라고 답했다.


병원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누나를 못 기다려주고 가냐고 울었다. 앵두는 많은 양의 피를 토하다 심정지가 왔다는데, 그 모습을 누나나 엄마가 보면 너무 슬퍼할까봐 일부러 빨리 간 것 같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 다 이기적인 합리화고 죽을 때까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와 누나를 얼마나 찾았을까 하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못 이겨 죽는 마당에 누굴 찾았을까, 나 자신을 찌를 정도로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기도 했다.


장례를 안내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병아리 담요에 내 딸기 수건을 깔고 앵두를 눕혔다. 그 때까지도 너무 따뜻했다. 그렇게 10시부터 다음날 13시까지, 15시간을 앵두와 함께했다. 고통스럽고 처절한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해가 영원히 뜰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현실 같은 악몽만 꾸다 악몽 같은 현실을 마주하니 숨이 막혔다.


앵두는 정말 자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몸이 점점 차갑고 굳어갔으며, 가족 누구가 어떤 소리를 내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앵두가 잘 때 몸 전체가 오르락 내리락 부풀었다 가라앉는 걸 정말 좋아했다. 가만히 등이나 배에 손을 얹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번에도 앵두의 배에 손을 얹었다. 무섭게도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눈도 뜨지 않았다.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눈 앞이 노래지고 가슴이 미어졌다.


가위로 앵두의 얼마 남지 않은 털을 잘라 지퍼백에 넣었다. 그리고 앵두의 곁에 얼굴을 바싹 대고 누웠다. 앵두 코는 그 때까지도 말랑하고 촉촉했다. 발바닥 젤리도 그랬다. 귀를 뒤집었다, 덮었다 했다. 다리 관절을 만지고 배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앵두의 앞다리에 앵두가 좋아했던 닭다리 인형과 공을 끼워뒀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껴안고 자는 영락없는 아기였다. 남이 보면 그냥 동물 사체에 불과한 그것을 15시간 동안 안고 뽀뽀하고 만지며 사랑한다 보고싶다 미안하다 울었다.


가끔씩 앵두를 불렀다. 앵두야, 앵두야. 앵두는 너무 피곤한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앵두의 앞발을 살포시 붙잡고 잤다. 새벽 다섯시 쯤 엄마가 그걸 보고 너무 많이 울었다. 나는 좀 혼자 울고 싶어 엄마와 아빠가 나가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가자마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통곡했다. 현관에서 엄마와 아빠를 배웅하고 탁탁탁 하며 돌아오는 발소리가 나지 않았고, 조그마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 집에 생명체는 오로지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소름끼치게 슬펐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슬픔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반려견을 키우고 떠나보내는 사람이 모두 이런 감정을 겪는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어지고 미어지고 슬프고 또 아팠다. 앵두를 병원에서 안고 데려오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았다. 믿기지 않았고 할 일도 많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례를 예약하고 엄마와 아빠가 나간 뒤 홀로 남은 나에게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안을 수 없다는 찢어지는 슬픔을 못이겨 펄펄 뛰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앵두는 눈 앞에서 자고 있는데, 앵두가 너무 보고 싶었다.


너 보고 싶어서 어떡해.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어떡해. 누나 너무 속상해, 하며 울고 울고 지겹게도 울었다. 만지고 싶고 보고 싶고 안고 싶고 같이 자고 싶은데 이제는 못 그런다는 사실이 나를 반쯤 미쳐버리게 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상실감이었다. 나는 잠든 앵두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제발 따뜻해지라고, 제발 눈을 뜨라고, 제발 나에게 와달라고 통곡했다. 그러다가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쓰다듬었다.


다이소에서 급하게 클레이점토를 사와 앵두의 발도장을 찍었다. 웃긴 건 근 몇 년 간 내 인생에서 앵두를 후순위로 밀어두고 걔와 함께하지 않았던 건 난데, 죽어서 싸늘해진 개 앞에서는 한 순간도 자리를 비우는 게 미안해 안달복달하며 다이소에 다녀왔다는거다. 내 인생에서야 근 몇 년이지만, 걔한테는 인생의 대부분이었을 시간이었다. 죽은 개 앞에서 예의를 갖추면 뭐하나. 이미 어딘가로 갔을텐데. 심지어 나의 그리움을 채우기 위해 사라진다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12시에 엄마와 아빠가 왔다. 함께 샌드위치를 먹고 장례식장에 갈 채비를 했다. 앵두의 간식이 너무 많이 남은 걸 보고 엄마는 또 울었다. 이거라도 많이 줄 걸, 아파서 못 먹이고 못 해준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산책은 철저히 우리의 실책이었지만 간식은 아니었다. 다이어트를 시킨다고 밥도 새모이만큼 주고 그 좋아하는 간식도 많이 못 준게 못내 명치를 짓눌렀다.


딸기 수건에 싸인 앵두를 그대로 안아 차에 탔다. 상자에 넣어 갈 수도 있었지만 안아 가고 싶었다. 엄마가 30분 정도 안고 있다가 내가 받아 안았다. 나에게 안긴 앵두를 보며 엄마는 "우리집에 올 때도 누나 품에서 오고 갈 때도 누나 품에서 가네"라고 말했다. 난 앵두를 보던 시선을 급하게 거둬버렸다. 숨이 턱 막혔다.


내가 간 곳은 김해 아이헤븐이라는 반려동물 장례업체로, 수도권에선 포레스트힐이라는 상호명으로 유명했다. 30만원 짜리 기본 패키지에 액자를 만들었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태백동 위쪽 공원에 가서 앵두랑 놀았던 때 찍은 사진을 썼다. 그 때 앵두가 엄마를 쫓아서 뛰어다니는 게 정말 귀여웠다. 엄마는 가만히 있다가도 이 사진만 보면 너무 예쁘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염을 하고 본 앵두는 정말 예뻤다. 입원 직전 간질 발작을 하며 똥오줌을 지린 탓에 죽고 나서는 분변이 나오지 않아 염이 빠르게 진행된 듯 했다. 엄마는 이것도 이쁘다며 기특해했다. 우리는 어제 밤 각자 너무 힘들었던 탓에 오래 슬퍼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자는 것 같았으며 몸은 아까보다 더 차가워진 앵두를 몇 번 쓰다듬었다.


장의사가 마지막으로 국화를 헌화하며 한 마디씩 하라고 했다. 엄마는 아프지 말라고, 당신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속삭였다. 나는 고민하다 겨우 말했다. "나에게는 네가 한 번도 행복이 아닌 적 없었어.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또 만나, 사랑해."라고. 나에겐 이 질문에 대한 앵두의 대답만이 위로였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마음으로 말했다. 아마 사랑한다고 했을 것이다.


화장을 하러 들어가는데 솔직히 참관할 자신이 없었다. 앵두가 장의사의 손에 들어올려지는데 한 눈에 봐도 몸이 너무 딱딱해보여 무너졌다. 몸에 한지를 덮고. 좋아하는 간식과 국화와 함께 앵두가 화장장으로 들어갔다. 이제 식어서 굳고 구릿한 냄새가 나는 사체를 끌어안고 잘 가라는 인사도 못 해주는 순간이 왔구나.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장면이 내 기억에 화상처럼 남으리라는 불행한 확신이 들었다.


화장장 참관을 끝낸 우리는 이제 한 고비 넘겼다며 각자 알로에 주스와 믹스 커피를 마셨다. 답답한 1시간이 지난 후 유골도 확인했다. 머리통이 요만했다. 나는 늘 앵두 머리통을 쥐면서 너무 작다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다. 한 손바닥에 겨우 찰 5키로 강아지의 유골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보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리울 땐 보드라운 털에 쌓인 머리를 쓰다듬는 촉감만 복기했을 뿐이다.  


유골은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밀봉팩에 담겨 나왔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도 액자로 받았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래도 춥진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면서는 먼저 강아지를 보낸 다슬이 언니와 지인이가 각자의 반려견 달마와 까미를 언급하며 앵두와 함께 있을 거라고 위로해줬다. 나는 그제야 정말 한 고비 넘긴 듯한 기분이 들어 안심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도 그랬는지 우리는 자주 가던 중국집에 들러 이틀 만에 밥 다운 밥을 먹었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앵두의 부재는 집 문을 여는 순간 가장 크게 느껴지는 탓이다. 유골 옆에 앵두의 액자를 놨는데, 엄마가 너무 괴롭다고 액자를 뒤집어달라고 했다. 너무 예쁘다며 울었다. 이제 집에 음식을 흐트러트려 놓을 수 있게 됐다며 울고, 베란다 문을 열어놔도 된다며 울었다. 집에 있는 모든 순간이 앵두의 부재를 확인하는 고통으로 가득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뼈를 녹이는 것 같았다. 들이키고 마쉬는 숨이 늘 젖어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에서 앵두를 철저히 후순위로 둔 것, 그래도 10년은 살겠지 마음 편할 대로 생각하고 만 것, 병원에 자주 데려가지 않는 엄마 아빠를 원망하며 정작 내 손으로 병원에 데려간 적은 손에 꼽는 것, 귀찮다는 이유로 발톱도 안 깎여주고 양치질도 안 시켜주고 발 털도 안 밀어주고 산책도 안 시켜주고 목욕도 안 시켜줬다. 세상 예쁜 강아지를 못난 보호자가 못나게 키웠다.


다른 강아지들이 그렇듯 앵두도 안으면 엄청 따뜻하다. 아프고 난 이후론 살도 쪄서 꽤 무거워졌는데, 덕분에 보온력이 더 좋아졌다. 겨드랑이와 옆구리에 또아리를 틀거나 턱을 괴고 자면 그렇게 안정감이 들 수 없었다.앵두는 모카빵 덩어리로 우리집에 와 사랑을 내뿜는 바디필로우가 됐다. 특히 몸에 가볍게 올라앉는 턱이 정말 좋았다. 매끈하고 부들부들한 배도 좋았고, 가볍게 잡히는 목주름을 비비는 것도 좋았다. 팔랑거리는 귀를 젖혔다, 닫았다 장난 쳐도 앵두는 화내지 않았다. 유난히 혀로 핥는 습관도 사실은 좋았다.


허공에 손을 뻗고 손가락을 구부려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불러도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는 건 나일롱 섬유가 살점에 눌어붙는 것처럼 질기게 아프다. 정말 끔찍한 건, 앞서 말했듯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시절은 내 욕심으로 다 날려버리고 마지막 순간만 함께한 탓에 차갑고 딱딱하게 잠들어버린 앵두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그리고 오래 갈 것 같다는 확신이다. 집에 돌아온 후 엄마에게 물었다. "왜 아프기 전의 앵두가 잘 기억나지 않는걸까." 엄마는 "네가 그 때 바쁘기도 했고"라고 답했다. 나는 그 때, 고작 부산에서 창원으로 통학하는 게 싫어 자취하겠다고 집을 박차고 나간 내가, 훗날 그 시기 가장 예뻤던 앵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안아줄걸, 더 행복하게 해줄걸, 더 잘해줄걸 같은 미련은 하다보면 끝도 없이 우울해질 것 같아 생존을 위해 그만둬야 한다. 그러나 당장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고, 사랑해줄 수 없고, 눈 맞출 수 없고,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아득하게 만든다. 이 고통은 내가 울고 소리지르고 날뛰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받아들여야지만 끝난다는 사실이 아찔하고 또 아찔하다.


앵두를 상실한 슬픔에 빠진 지금, 반려견의 사랑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종의 것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말도 종도 통하지 않는 우리 사이에 아주 크고 명확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했다는 것도 피부로 생생히 느끼고 있다. 내가 게으르고 모자랐지만 우리는 분명히 나름의 사랑으로 교류했다. 이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도 앵두의 동그란 눈빛, 그 눈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여주던 그 눈빛.


첫 정이 무섭다고 했다. 앵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겪은 종류의 사랑이다. 얘의 눈빛과 마음에서 일말의 불순물도 느낄 수 없었다. 이것이 내가 앵두에게서 발견해낸 새로운 농도의 사랑이다. 100%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앵두가 자신의 한 평생에 걸쳐 나에게 보여준 사랑은, 내가 100%니 90%니 기준이나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농도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무리 탁한 것을 건네도 앵두는 맑게 삼킨다. 이 사실이 나를 너무 울게 한다.


앵두의 사랑은 정화의 힘이 정말 강했다. 내가 불순물이 가득 담긴 마음을 보내도 앵두는 그걸 맑게 걸러냈고, 반대로 앵두가 맑은 것을 보내 내 마음을 정화하기도 했다.


이제 남겨진 마음을 오랫동안 맑게 보존해야하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 됐다. 앵두가 7년 간 가르쳐준 그 사랑의 방식을 잘 꺼내서 곱씹고 또 곱씹으며 앵두와 같은 마음으로 앵두를 사랑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나이게 첫 사랑과 상실을 준 생명에 대한 도리이자 예의이며 그의 마음에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인 것 같다. 아주 괴롭고 외롭고, 사무치게 그립고 온 몸이 아릴 정도로 보고 싶고 안달이 나 엉엉 울기도 할테다. 그래도 사랑하길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산소방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 죽을 힘을 다해 일어나 냄새를 맡으러 온 앵두가 그러했듯이.


화장장으로 가는 앵두의 오른쪽 앞다리에 내 머리카락을 묶었다. 오른쪽 뒷다리에는 엄마 머리카락이 묶여 있다.


그것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으려 한다.

앵두라면 믿었을 것이기 때문에다.

맑고 순진한 눈동자로. 나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코를 대며.


사랑하는 나의 첫 강아지.

네가 준 사랑을 다시 너에게 돌려주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단 한 번도 네 사랑을 의심한 적 없었어.

나도 너에게 의심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베풀고 싶다.


잘 가.


2014.4.X ~ 2021.5.3 나의 강아지

작가의 이전글 보통 사람들의 전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