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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하 Sep 16. 2022

아버지의 노트

미궁의 실타래 풀기

책장 정리를 하다가 아버지의 노트를 꺼내 듭니다. 빛바랜 아버지의 노트는 전설속에 나오는 마법노트처럼 아주 클래식합니다. 지적인 아버지의 필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건너 온 세월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내 일생동안 나를 따라다니는 수호신이었어요. 그럼에도,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는 일은 언제나 미궁을 찾아 들어가는 일이어서 번번이 회상하다 말다를 반복하고만 있었지요.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의 노트를 펼쳐들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의 모서리까지 가닿아 보렵니다.


검은 원,  1913/ Kazimir Malevich



아버지는 자살을 하셨다....... 그런데 나는 꼭,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만 여겨지는 건 무슨 연유일까. 물론 아버지는 병으로 쓰러지셔서 병가를 받아 투병을 하셨다. 신체의 절반이 마비되셨던 아버지가 지팡이 없이 두발로 걷기까지는 일 년이 걸렸다. 엄마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이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일 년 만에 다시 출근하시던 날, 한 자루의 총으로 생의 뜨거움을 단 한 번에 식혀버렸다. 그러니까 당신은 죽으려고 작정을 하고 출근을 하신걸까. 파출소 소장이셨던 아버지가 순경들이 모두 외근을 나간 사이, 혼자서 얼마나 많은 회한의 상념들을 떠올리셨을까. 그 마지막 순간, 찰나적으로 스쳐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살아남은 자는 알고 싶어도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무책임한 아버지를 이해조차 할 수 없어서 오랫동안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그 어려운 용서 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두고 그렇게 가야만 했던 아버지가 병에 걸려서 그런 거라고 수천수만 번을 되뇌다보니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무의식은 그것이 사실처럼 여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선비이고 농부이셨던 우리 할아버지의 장남이었다. 장남의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메고 중고등학교도 타지에서 다니셨고, 대학도 서울에서 다니셨다. 마지막 한 학년을 남겨놓고 등록금이 없어서 입대를 하셨고, 제대하고 등록금을 벌어서 복학하려고 경찰 시험을 보셨다고 하셨다. 운명의 장난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하였나. 안 만나주면 죽겠다는 엄마를 만나서, 등록금을 벌려고 시작했던 일이 평생 직업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거다. 결혼을 해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혼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후자였다. 돈을 벌면서부터 가난한 시골의 장남은 밑으로 줄줄이 달린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생들 모두 출가를 시키고 난 후, 아버지는 한 학년 못 마친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지치셨을까. 정서적이고 지적인 소통을 원하셨던 아버지가 아이 같은 엄마를 다독이느라고 아버지는 가정에서도 쉴 수가 없으셨고, 열망을 오랫동안 체념하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병으로 찾아왔던게다. 일 년여의 시간동안 건강이 회복된 듯 하였으나 그것은 아버지의 외연일 뿐이었다.


그 날은 회색빛 하늘아래 우울한 공기가 감도는 날이었다. 고3 이었던 나는 자율학습시간에 맞춰서 학교에 일찍 갔지만 모두가 공부하는 그 시간, 학교 운동장 구석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감지 한 듯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느라 학교에 일찍 갔음에도 지각을 하고 말았다. 지각을 했다고 손바닥을 다섯대나 맞았다. 눈물이 더 쏟아졌다. 하교 길은 아득했고 걸음이 후들거려서 몸살이 난 줄 알았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성적표를 감추느라고 굳게 잠군 내 책상 서랍이 날카로운 연장으로 힘을 주어 열린 흔적과 성적표들이 책상위에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는 것조차도 아득하게 보이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옆집 아주머니가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주셨다. 엄마는 이미 현장에 가서 실신하였고, 학교 끝나고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옆집 아주머니가 기다렸던 것이다.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겠다는 나를 고모들은 말렸다. 내가 너무 어리다고 못 보게 했다. 하지만 나는 봐야만 했다. 엄마가 정신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 한사람은 그 마지막 모습을 봐야 된다고 생각했다. 기어코 시신을 보고 말았다. 이마에 구멍이 나버린 아버지. 그 반듯한 이마에, 그 눈부신 하얀 피부에 오롯하게 뻥 뚫려 버린 블랙홀이 마치 영혼의 구멍 같았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고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져보고 싶었으나, 만지면 아예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릴까봐 만지지는 못했다.


그날 이후로 세상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늪은 나를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시켰다. 현실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휘청거리기만 했다. 아버지의 퇴직금을 엄마가 장사 밑천으로 모두 날리면서 우리는 쌀독에 쌀이 없는 날도 있었지만 엄마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동생인 아들만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공부를 시켰다. 성장하는 동안 곱게(?) 자란 나는 감당하기도 어려운 슬픔을 이고 지고 일을 하며 대학 공부를 했다. 내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든 내가 엄마의 고통이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밤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는 엄마와 나 사이에서 내동생은 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세상이 그토록 원망스러운 적이 언제 또 그렇게 있었을까. 그러나 지금, 세월을 돌아와 당신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써 내려가고 있다. 의지 할 곳이 세상 어디에도 없던 시절을 견뎌내고, 돌아보고 싶지도 않던 일을 옛이야기처럼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도 생겼다. 그 옛날에 성적표를 감추던 소심한 아이는 이제 반백살이 되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아버지 나이보다도 더 먹었다. 아버지보다 더 먹은 나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할 일이 더 내게 남아있다는 증거일수 있겠다.


아버지의 노트를 다시 펼쳐든다. 비애가 스며 있다는 느낌마저도 묵직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버지의 필체는 힘차고 단단해 보인다. 아버지의 전처를 밟지 않으려고 결혼을 하고서도 공부를 포기 하지 않았던 나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가셨는지 어렴 풋 이해하게 되었다. 존재를 찾기 이전에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았던 아버지는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리라 짐작해본다. 아버지, 당신의 영혼을 이제 헤아린다. 미궁을 찾아 들어가던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덕분에 미궁을 빠져 나올 수 있던 것처럼, 미궁은 찾아들어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다. 아버지가 살다 가신 흔적들이 디딤돌이 되어서 당신이 다 하지 못한 삶의 인고를 살아남은 자가 성실하게 사는 길이 미궁의 실타래를 푸는 길이겠다. 용서와 이해는 이미 오래전 내 몫이 아니었음을, 살아 있는 동안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이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삶을 살려내는 일이며 사랑하는 일이었음을,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기에는 인간의 삶이 각자 개별적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살아온 생의 감각으로 오늘 이렇게 비로소 당신을 마주한다.


가여운 아버지, 앞으로는 아버지의 노트를 더 이상 비애스럽게 펼쳐들지 않을게요. 나보다 젊었을 아버지를 꼬옥 안아드릴게요.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저 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엄마 걱정은 정말로 하지 마세요. 아직도 아이 같은 엄마를 저와 동생이 잘 챙기고 있으니까요!







***엄마 이야기는 언제쯤 쓸수 있을까. 아버지 이야기를 이제서야 겨우 쓴 걸 보면, 엄마 이야기는 앞으로 수년 후에도 못 쓰지 싶다. 엄마와 나사이의 사랑이 결핍된 이야기, 시도조차도 못하고 아름다운 엄마로만 남겨두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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