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_고비사막 ep.03
(이어서)
욜린암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들어오자 저 멀리 우리를 반겨주는 무지개가 보인다.
구름에 가려 발목 정도만 보여주고 있지만 그래도 반갑다.
게르 앞, 넓은 들판에 염소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지내게 될 게르는 편하게 볼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과 씻을 수 있는 샤워실이 갖추어져 있다.
어제 있었던 게르에는 샤워실은커녕 화장실도 없어서 잠들기 전 물티슈로 몸을 간신히 닦아냈지만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있는 상태다.
나는 세면도구를 챙겨 곧장 샤워실로 직행했다.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지 않아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몸을 씻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졸졸 흐르는 물에 머리를 적시니 금세 기분이 좋아져 목욕하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나와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아까 도시를 지나는 길에 들렸던 마트에서 사 온 와인과 맥주 몇 캔을 저녁상에 같이 올려놓았다.
덕분에 근사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금세 어둑해졌다.
오늘도 어제처럼 전통 게르에 초대가 되었다.
아무런 가공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갓 짜낸 말 우유를 대접해주셨다.
어미 고양이와 염소 새끼는 목줄을 하고 게르 앞을 지키고 있었고 게르 안에는 새끼 고양이들이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들판에는 염소 떼와 말이 나를 이리저리 피해 도망 다닌다.
몽골 유목민들의 삶은 동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어둠이 짙어지면 늑대가 게르 가까이까지 올 때도 있다고 한다.
밖에서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왠지 늑대 울음소리인 것 같다.
게르의 문을 꼭 닫고 잠을 청한다.
오전 여섯 시,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다.
오늘 일정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어서 일찍이 일어나야만 했다.
겨우 뜬 눈을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차와 여러 가지 메뉴들로 채워진 아침식사.
안 먹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어떻게든 입안에 욱여넣어본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 도로를 달린다.
덜컹- 덜컹- 손잡이를 잡고 애처롭게 매달려도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중심 잡기가 쉽지 않다.
창문을 닫아놔도 어디서 들어오는 건지 차 안은 먼지로 뿌옇다.
결국 손수건 같은 걸로 코와 입을 가렸다.
저 멀리 오늘 우리가 오를 산이 보인다.
(사실 산인지 언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올랐을 때의 체감은 산이었기에 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등산이라고 하면 오름 직한 동네 뒷산이나 가끔 분위기 내고 싶을 때 오르는 북한산 또는 관악산 정도를 생각했지 모래산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발이 모래에 푹푹 빠지는 이곳에 오자 내가 생각하는 '진짜 사막'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사막은 모래로 가득한 황무지 같은 곳이었다.)
몽골의 고비사막은 모래사막보다는 암석 사막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모래산은 양옆으로 길게 이어져있다.
누가 모래를 저리도 높게 쌓아놨을까.
거인들이 우리가 모래성 놀이를 하듯 쌓아놓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해가 될 것 같다.
자연의 신비란 알면 알수록 그 신비로움이 더해지며 경이롭다.
뒤를 돌아보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있다.
내 위의 하늘은 이리도 맑은데 저 멀리 보이는 곳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짙은 먹구름에서 내리는 물줄기가 땅에 쏟아지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참으로 진귀한 장면이다.
드디어 시작된 산행.
내가 가야 할 길과 올라야 할 정상이 한눈에 들어와서인지 이렇게만 보면 금방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삶 속에서 오르고 있는 산은 모래산보다는 나무들로 가득한 산과 비슷한 것 같다.
빽빽한 나무들 때문에 정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굴곡진 길 때문에 바로 앞도 예측할 수 없다.
길 중간중간 튀어나온 돌부리와 나무뿌리들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툭툭 털고 일어나 묵묵히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가까워져 도시는 작은 풍경이 되어 낭만으로 기록된다.
모래가 굉장히 곱다.
그러다 보니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진다.
신발 안에 가득 찬 모래를 비워내도 금세 다시 모래로 가득 찬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선두를 달리기 시작한다.
점점 벌어지는 격차.
내가 남겨놓은 발자국에 그들의 발자국이 포개져 길이 만들어진다.
내가 걸어온 길,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일행의 모습 그리고 그 너머엔 비가 내리고 있다.
아무래도 고산지대이다 보니 오르면 오를수록 호흡하는 게 힘들어진다.
몇 발자국만 걸어도 숨이 금방 차오른다.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허리를 굽혀 호흡을 고르게 된다.
정상에 가까워졌다.
높은 위치에 올라오자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쏟아지듯 나의 눈에 담긴다.
가슴이 벅차다.
이 모든 풍경을 내 눈에 그리고 가슴에 담을 수 있다니.
그리고 또다시 나는 이 광활한 자연 속에 덩그러니 놓여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사막 한가운데, 겨우 이 오르막길에 몇 발자국만 간신히 남겼을 뿐이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정상의 모래는 뾰족하게 쌓여 있다.
정상에 앉아 한동안 풍경을 감상한다.
정상에 오르자 어느새 비구름이 가까워졌다.
이내 내 머리 위에 주차를 해놓고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한다.
흩날리는 빗방울에 굴하지 않고 이 멋진 경관을 무료로 마음껏 누렸다.
눈과 마음에 이 풍경이 잊히지 않을 만큼 가득 주워 담고서 정상에서 내려온다.
나는 가끔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여기서 점프해서 내려가고 싶다.", "미끄럼틀이 있었다면 순식간에 내려갔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곳에서는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가능하다.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캥거루처럼 껑충껑충 뛰어 내려간다.
올라올 땐 중력의 저항을 받았다면 내려갈 땐 중력의 도움을 받아 내려간다.
"나 내려가고 있어요!" 하며 흔적을 잔뜩 남기면서 내려간다.
동생의 다리를 끌고 썰매를 태워주기도 한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빠 오는 호흡.
높은 지대라 숨 쉬는 게 내 마음처럼 쉽지 않다.
정상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내려다본다.
내려올 때는 굳이 내가 밟았던 길을 찾을 필요 없이 신나게 굴러 떨어지거나 뛰어서 내려오면 된다.
다음엔 비료포대를 챙겨 와서 썰매를 타봐야겠다.
산에서 내려와 우리는 차 앞에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놓고 아빠, 동생, 가이드, 운전기사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모여 앉았다.
아빠는 첫 번째 코스로 금세 맛있는 수프를 끓였고 빵과 같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코스는 컵라면이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하늘 아래에서 캠핑 의자에 앉아 라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나는 꼬들면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한 젓가락 뜬다.
호호- 불어 후루룩- 한 입 가득 넣는다.
잘 익은 김치도 하나 주욱- 찢어 입에 넣는다.
라면이 이토록 맛있었던가.
사실 맛도 맛이지만 풍경과 분위기가 좋은 조미료가 되어주었다.
원래 캠핑 중에 먹는 라면이 꿀맛이 아니던가.
라면에 풍경 한 스푼, 분위기 한 스푼 그리고 허기짐 두 스푼을 넣었더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