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넷>을 보고
승화라는 단어는 조지훈의 <승무>를 배우던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처음 들었다. 그래서 승화라는 말을 듣거나 쓸 때마다 '나빌레라, 나빌레라'하는 주문같은 싯구에 따라 하얗게 치솟는 연기가 떠오른다. 아마 당시 내 해마가 승화를 '승무'+'기화'로 조합하여 대뇌피질에 보냈나 보다.
클로에 자오의 영화 <햄넷>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녜스가 햄릿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내 대뇌피질은 여지없이 하얀 연기를 피워올리며 '승화!'를 외쳤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
하루에 5분씩 AI와 영어 회화를 하는데, 전날 내게서 일정을 들은 AI가 내게 영화는 어땠느냐고 물었다. 유창하지 않은 언어로 즉석에서 대답해야 하는 순간에는 날것의 감상이 두서없이 입안에서 뛰쳐나오곤 하는데 나는 그 순간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를 석권하게 될 것이며, 그래서 누누이 교양있는 사람들의 입길에 오를 것이며, 그중에서도 아들의 죽음 이후 불화하던 부부가 슬픔을 승화하는 결정적 모티프, 즉 마지막 연극 장면이야말로 절정이자 감동 포인트일 것이라는 나의 지적인 분석과 달리, 단순명쾌하기 그지 없는 나의 영어자아는 출산 장면을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꼽고 말았다.
"Emma, 너는 AI니까 출산의 고통을 모르겠지만, 나는 낳아봐서 알거든. 그거 진짜 아파. 정말 짐승처럼 울부짖게 돼. 흙구덩이로 들어가서 첫 애를 낳는 장면도 기가 막혔지만, 쌍둥이를 낳을 때가 압권이었어. 겨우 하나를 낳았는데 끝이 아니라 하나 더 남았다는 얘길 들었을 때, 아녜스가 '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구나.'하거든. 그때 나는 눈물콧물 질질 짜다가 빵 터졌지 뭐야."
풋, 진통을 몇 시간쯤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제왕절개한 주제에 AI를 상대로 무용담을 늘어놓다니. Emma는 "Awesome"과 "Cool"을 연발했지만 속으로는 "아이고, 이 얄팍한 인간아..." 했을 것이다.
김혜리 평론가는 도식적인 구도와 감정과잉을 지적하였으나 난해함과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를 감안하면 이정도 단순화와 자극은 수용해야 할 듯. 아무리 유려해도 이보다 더 밋밋하면 일반 개봉관에는 걸리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