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고
"눈물 닦고 나면 모든 것이 에피소드"라는 말을 좋아한다. 주로 어디선가 날아온 돌팔매를 맞고 어안이 벙벙할 때면 이 말에 기대어 위로를 얻곤 한다. 이를테면 제주도에서 산지 8년만에 드디어 정착을 결심하고 집을 사서 이사했는데 반 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이 이직을 통보하고 육지로 떠났을 때 제일 떠오른 말이다. 최근에는 아이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살 요량으로 전세를 구했는데 다주택자인 주인이 3개월 만에 집을 내놓겠다고 했을 때 셋방살이 서러움을 삼키며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집이 내 눈물버튼인가 보다.
인생의 버팀목이 되는 이 위대한 말을 누가 했느냐 되짚어보면 <김혜리의 필름클럽>의 공동진행자인 최다은 피디다. 에피소드를 확정하고 싶으나 꽤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하다. 하물며 희미한 기억에서 추정되는 바로는 최다은 피디조차 이 말을 인용처럼 흘렸다. "왜 눈물 닦고 나면 모든 것이 에피소드라고들 하잖아요."하는 식으로.
정확하게 같은 문장은 아니지만 비슷한 맥락을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김중혁 작가도 말한 적 있다. 어이없는 사건을 겪을 때면 "와, 쓸거리 생겼다."하며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든다는 얘기를.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나 공감의 범위가 광대하다는 점에서 격언이나 명언 보다는 속담에 가까운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고린도전서 10장 말씀과도 맥이 닿는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한때는 눈물을 흘리겠지만 결국은 마를 것이고 지나고 나면 이야깃거리로 쌓여 너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레퍼토리가 될 것이라는 응원의 메시지다.
스즈키 유이의 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괴테 연구가인 도이치가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라는 문장을 우연히 맞닥뜨리고선 이 말이 과연 괴테의 것인지를 되짚어가는 여정을 다룬다.
굉장히 의미심장하면서도 정확한 뜻이 모호한 이 문장의 원류를 찾는 와중에 독자들은 니체와 보르헤스 혹은 성경구절과 잇거나 겹쳐보는 학자적 경험을 만끽하게 된다. 부득의한 각주의 난립에 읽는 흐름은 자주 끊기고 그래서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가독성이 좋은 소설에 대한 기대를 접고 차츰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자주 쓰지 않는 뇌회로가 작동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말을 끝까지 믿지 못하는 남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 말을 믿어줄 수 있었다.
그 말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도이치는 자신이 찾아다녔고 괴테의 말이라고 믿고 싶었던 그 말이 한낱 착각과 오해와 첨언으로 빚어진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파우스트>를 해설하는 TV 방송에서는 그 말을 괴테의 것으로 확정하는 용단을 내린다. 비록 괴테가 정확히 그 문장을 말했노라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사랑이 모든 것을 혼연일체로 만든다"는 말에는 분명 괴테는 물론 서양문학사조 전체를 감싸는 진실이 들어있었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깨닫는 과정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단정하게 뒤섞는 사랑의 힘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크고 묵직한 이야기 끝에 도이치의 아내가 "파우스트 재있더라"라고 하는 것으로 가볍게 종지부를 찍는 데서 비로소 23살 신예 작가의 소설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오타쿠가 43살이 되면 어떤 소설을 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