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나만의 것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읽고

by 쇠네스보헨엔데

최근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나라를 여행하던 중 심하게 앓았다. 아파도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코인지 목인지에서 이물질이 펑펑 쏟아지는데 후두가 잔뜩 부어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응급실행을 택했다. 발열과 기침 같은 눈에 띄는 증상이 없었던지라 진통제 투혼으로 정해진 일정을 따라가던 중이었고, 그래서 느긋하게 카레와 돈카츠를 먹던 11명의 일행들 앞에 조용히 손을 들고 "저는 병원에 좀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일제히 나를 말갛게 쳐다보았다.


"왜? 병원에 무슨 볼거리라도?"


독립투사처럼 홀로 식당을 나가 AI 번역기의 도움으로 진료를 받고 covid-19 확진 진단서와 항생제 봉투를 들고 복귀한 나에게 일행 중 한 명이 숙소 끄트머리 방 하나를 비워주며 말했다.


"우린 정말 병원에 구경가자는 건 줄 알았잖아."


그들이 그토록 무심할 수 있었던 연유에는 그들이 온통 내 남편과 혈연으로 엮어진 관계라는 정황이 무관치 않을 것이나 원망은 않기로 한다.


받아온 약 덕분에 통증은 금방 완화되었으나 연로한 시부모님께 혹시라도 병을 옮길 수는 없어 남은 꼬박 하루동안 나는 격리를 자처했다.


그렇게 여느 여행자에겐 코발트 바다와 높은 하늘, 수족관 고래 혹은 달고 짭조름한 음식으로 기억될 그 섬이 내겐, 이틀간 타이레놀에만 의지하여 코로나를 견디느라 경험한 신개념 통증과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발로 걷어차주고 싶도록 느리게 진료하던 의사와 차고를 개조하여 어두침침한 방에 홀로 앉아 방문 앞에 놓인 연두부와 계란찜과 도시락을 조금씩 먹어가며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읽었던 기억으로 남았다.


읽기 쉽지 않았으나 휴대폰을 제외하고선 내 손에 닿는 단 하나의 미디어였기에 꾸역꾸역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책은, 돌연 뇌사한 한 젊은이의 장기를 이식하는 과정을 매우 다면적이면서도 아주 건조하게 그리는 소설이다.


주인공 시몽이 서핑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초반까지만 해도 제법 리드미컬하게 읽히던 책은, 시몽이 병원에서 뇌사 판정을 받고 각 장마다 시점이 이동하며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이 뇌사를 조망하는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자꾸만 맥이 끊겼다. 원래도 프랑스 문학의 모호하고 장황한 묘사에 쉽게 좌절하는 편인데다가, 당시 저조한 컨디션이 더해져 거의 모든 시점 이동의 순간 내 정신은 안드로메다행을 택하고 말았다.


그나마 아들을 잃은 와중에 장기이식을 결정해야 하는 부모가 등장한 대목에서는 감정이입을 했더랬는데 그마저도 서술이 건조하기가 한겨울 찬바람같아서 흠뻑 젖어들진 못했다.


"마리안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침대로 돌아간다.

그녀를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의 물체처럼 그곳에 홀로 남게 된 시몽에게서 흘러나오는 고독이다.

그는 이제 인간의 몫을 벗어던진 것만 같다.

더는 공동체와 결부되지 않고

의도와 감정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지 않고

절대적 사물로 변해 떠돌고 있는 것만 같다.

시몽은 죽었다."


어느덧 통증이 가시자 바깥에서 하하호호 즐거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여행와서 이게 무슨 노릇인지 한탄이 새어나올 때쯤, 마스크를 쓴 딸이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렇지, 너는 내가 그립구나. 저 11명의 무리 중 유일한 내 혈육.


격리의 의미를 깜빡 잊고 부둥켜 안을 뻔한 순간, 아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한다.


"힝, 나는 스시가 먹고 싶단 말이야."


애미가 아파 죽든 말든 저녁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부리러 온 9살에게 그순간 나는 진심으로 삐쳤다.


한 생명이 무참히 죽었고 그 부모가 비탄에 젖었는데 제 연애사에 겨워 부재중 전화에 웃고 울던 간호사 코르델리아처럼, 우리는 세계를 분할하여 제각각 살아가고 접점에서 가끔 이어지거나 충돌할 뿐이다. 누군가 죽으면 그 심장을 이어 받아 살아나는 세계가 있고, 죽은 자의 심장을 산 자에게 옮기는 일을 담당하여 부와 명예를 누리는 세계도 있다.


앓아 누워 죽만 겨우 넘기는 세계의 문지방 너머에는, 낮에는 스노클링을 하고 밤에는 샤브샤브를 먹을까 스시를 먹을까 고민하는 세계가 있었으며, 그 세계의 명징한 구분은 '내가 너를 낳았는데' 따위의 하소연으로 무마되지 않았다.


책은 심장 이식 수술 성공으로 마무리 된다. 이식을 받은 클로이가 새 삶을 얻고 환희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현실에선 생명이 죽음보다 환대받기 마련이므로, 이야기에서만이라도 죽음이 좀 더 엄중하게 그려지는 쪽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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