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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레나 Sep 18. 2022

오래된 친구

온라인 영어 학습을 시작했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나의 욕망은 20년째 한결 같으며 애석하게도 영어 회화 실력 또한 제자리 걸음이다.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는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미국인을 내세운 영어 학습 사이트에 큰 마음을 먹고 가입을 했다.

가입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라이브 수업을 듣고 있는데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채팅창으로 멘트를 남길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여러 닉네임을 가진 사람들의 멘트가 뜨고, 

"어?"

잊고 있던 익숙한 아이디가 내 눈에 들어왔다.

third0524 

0524는 생일이고 third는 자매 중 셋째이기 때문에 옛친구가 사용하던 아이디.


우리는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주 만나 영어 공부를 함께 했었다.

20년 전, 동성로에는 지금도 있는 '지오다노'브랜드의 옷 가게가 4층짜리 건물로 크게 있었는데 그 가게의 4층에는 '지오카페'라고 하여 카페가 매장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카페가 조용하고 음료값이 쌌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곳에 모여서 영어공부를 하곤 했었다.

아마 1,500원에서 2,0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레모네이드나 핫초코를 시켜 놓고(음료를 시키면 갈색의 쿠키를 하나씩 접시에 담아 서비스로 준 것도 기억난다.) 영어회화 책을 펼쳐놓고 영어로 어줍잖은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 같다. '소피'와 '브리짓'과 '레나'

그 중 third0524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던 '소피'는 늘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싶어 했었다.

영어 공부에 진심이었던 친구였기에 '아, third0524가 어쩜 진짜 그 친구일 수도 있겠구나.'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연락을 했고, 역시 그 친구가 맞았다.

우리는 서로 놀라워했고 그 옛날 '소피'와 '브리짓'과 '레나'가 카톡방에서 만났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도 너무 친숙하고 애틋한 느낌. 오래된 친구가 내게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내 모든 걸 포옹하고 이해해줄 것만 같고, 그 옛날 우리가 자주 갔던 '지오카페'의 핫초코처럼, '동성로 카페명가'의 카페모카처럼, '쟁이'의 테이블마다 놓여있던 양초처럼 따뜻한 존재로 다가왔다.

우리는 '지오카페'도 자주 갔지만 '쟁이'라는 독특한 레스토랑&bar에도 자주 갔었다.

가게 내부가 온통 컴컴한 가운데 테이블마다 양초 하나가 놓여 있어 테이블에 앉은 서로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게 되어 있던 독특한 장소였다. 누런 때가 묻은 방명록 책들이 가득 쌓여 있던, 어둡고 아늑했던 공간에서 우리는 4,000원짜리 볶음밥과 가격이 기억나지 않는 음료들을 사먹었던 것 같다.

그 때, 우리는 참 시간은 많았고 돈은 없었으며 동성로를 자주 들락거리며 컴퓨터나 영어 등을 함께 공부하며 밝은 미래를 꿈꾸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한 친구는 독신으로, 한 친구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서로 다른 지역에 떨어져서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20년 전과 마음은 그대로인데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오랜만의 카톡방에서 그랬듯이, 우리는 지금 만나도 별 것 아닌 일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팔짱을 끼고 느릿느릿 걷겠지.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소피', '브리짓'처럼 함께 느릿하게 걸으면서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팔짱을 끼고 느릿느릿 걸으며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내가 하고 있는 말을 잘라먹고 자신의 말을 시작할까봐 내 말을 서둘러 전달할 필요도 없는 편안한 대화.


마음이 따뜻해진다. 옛 친구들을 만나면 손편지와 함께 예쁘게 포장된 선물도 전달하고 싶다.

손편지를 써 본 적이 언제였던가? 친구를 위해 선물을 사 본 적이 언제였던가?

예쁘게 잘 포장된 선물 상자와 빵빵하게 접힌 편지지를 품고 있는 밀봉된 편지봉투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우리는 여름, '브리짓'의 생일날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직 5개월이나 남아서 '우리 까먹는거 아니야?'했지만 그 5개월 동안의 기다림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닌 것 같다. 

그간의 좋고 나빴던 추억과 경험들을 되돌아 보게 되고 나를 새로운 감정으로 이끌어 가는 것 같다.

오늘 차에서 들었던 이누아샤ost, 따뜻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옛 친구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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