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영어 학습을 시작했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나의 욕망은 20년째 한결 같으며 애석하게도 영어 회화 실력 또한 제자리 걸음이다.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는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미국인을 내세운 영어 학습 사이트에 큰 마음을 먹고 가입을 했다.
가입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라이브 수업을 듣고 있는데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채팅창으로 멘트를 남길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여러 닉네임을 가진 사람들의 멘트가 뜨고,
"어?"
잊고 있던 익숙한 아이디가 내 눈에 들어왔다.
third0524
0524는 생일이고 third는 자매 중 셋째이기 때문에 옛친구가 사용하던 아이디.
우리는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주 만나 영어 공부를 함께 했었다.
20년 전, 동성로에는 지금도 있는 '지오다노'브랜드의 옷 가게가 4층짜리 건물로 크게 있었는데 그 가게의 4층에는 '지오카페'라고 하여 카페가 매장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카페가 조용하고 음료값이 쌌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곳에 모여서 영어공부를 하곤 했었다.
아마 1,500원에서 2,0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레모네이드나 핫초코를 시켜 놓고(음료를 시키면 갈색의 쿠키를 하나씩 접시에 담아 서비스로 준 것도 기억난다.) 영어회화 책을 펼쳐놓고 영어로 어줍잖은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 같다. '소피'와 '브리짓'과 '레나'
그 중 third0524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던 '소피'는 늘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싶어 했었다.
영어 공부에 진심이었던 친구였기에 '아, third0524가 어쩜 진짜 그 친구일 수도 있겠구나.'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연락을 했고, 역시 그 친구가 맞았다.
우리는 서로 놀라워했고 그 옛날 '소피'와 '브리짓'과 '레나'가 카톡방에서 만났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도 너무 친숙하고 애틋한 느낌. 오래된 친구가 내게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내 모든 걸 포옹하고 이해해줄 것만 같고, 그 옛날 우리가 자주 갔던 '지오카페'의 핫초코처럼, '동성로 카페명가'의 카페모카처럼, '쟁이'의 테이블마다 놓여있던 양초처럼 따뜻한 존재로 다가왔다.
우리는 '지오카페'도 자주 갔지만 '쟁이'라는 독특한 레스토랑&bar에도 자주 갔었다.
가게 내부가 온통 컴컴한 가운데 테이블마다 양초 하나가 놓여 있어 테이블에 앉은 서로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게 되어 있던 독특한 장소였다. 누런 때가 묻은 방명록 책들이 가득 쌓여 있던, 어둡고 아늑했던 공간에서 우리는 4,000원짜리 볶음밥과 가격이 기억나지 않는 음료들을 사먹었던 것 같다.
그 때, 우리는 참 시간은 많았고 돈은 없었으며 동성로를 자주 들락거리며 컴퓨터나 영어 등을 함께 공부하며 밝은 미래를 꿈꾸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한 친구는 독신으로, 한 친구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서로 다른 지역에 떨어져서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20년 전과 마음은 그대로인데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오랜만의 카톡방에서 그랬듯이, 우리는 지금 만나도 별 것 아닌 일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팔짱을 끼고 느릿느릿 걷겠지.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소피', '브리짓'처럼 함께 느릿하게 걸으면서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팔짱을 끼고 느릿느릿 걸으며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내가 하고 있는 말을 잘라먹고 자신의 말을 시작할까봐 내 말을 서둘러 전달할 필요도 없는 편안한 대화.
마음이 따뜻해진다. 옛 친구들을 만나면 손편지와 함께 예쁘게 포장된 선물도 전달하고 싶다.
손편지를 써 본 적이 언제였던가? 친구를 위해 선물을 사 본 적이 언제였던가?
예쁘게 잘 포장된 선물 상자와 빵빵하게 접힌 편지지를 품고 있는 밀봉된 편지봉투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우리는 여름, '브리짓'의 생일날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직 5개월이나 남아서 '우리 까먹는거 아니야?'했지만 그 5개월 동안의 기다림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닌 것 같다.
그간의 좋고 나빴던 추억과 경험들을 되돌아 보게 되고 나를 새로운 감정으로 이끌어 가는 것 같다.
오늘 차에서 들었던 이누아샤ost, 따뜻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옛 친구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