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한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는 것 보다,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 보다, 낯선 곳에서 나는 냄새와 분위기를 좋아한다.
20년도 더 된 여행에서 느꼈던 분위기와 그 때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1. 고1 수학여행 때였다. IMF 때문에 예전보다 짧은 일정으로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원래는 기차를 타고 가던 것을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 수다를 떨며 버스에서 시간을 보내다 산과 산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다리로 우리 버스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어?' 산은 정말 웅장하고 거대해서 나를 순간 압도했다. 그때 부터 버스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설악산이 가까워질 수록 풍경은 더 웅장해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던 순간의 느낌도 기억이 난다. 웅장한 산 아래 유스호스텔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 따뜻한 봄이였지만 저 거대한 산에서 내뿜는 시원한 공기가 서늘하기까지 했다. 짙은 나무 내음과 서늘한 공기, 나의 컷트머리와 촌스러웠던 파란 체육복이 세트로 내 기억 속에 존재한다.
2. 대학교 때, 나는 적응을 잘 하지 못하고 겉도는 생활을 했었는데 같이 어울려 지내던 언니들이 몇 명 있었다. 담배를 몰래 피곤 했던 서울에서 온 A언니와 독특한 외모만큼이나 독특한 성격을 가졌던 울산에서 온 B언니와 여름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자취방에 남아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점심을 같이 먹다가 갑자기 통영의 한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그 섬을 몰랐을텐데 아마 언니 중 한명이 알고 있던 섬이었을 것이다. 통영의 소매물도. 버스를 타고 통영 터미널에 내려 여객터미널에 가기 전에 충무김밥도 사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후 늦은 시각에 소매물도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숙소 예약도 없이 그 늦은 오후에 어떻게 섬에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참 겁도 없었다 싶다.
소매물도로 가는 배에서 나는 배의 제일 앞부분에 서서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처럼 팔을 벌려 눈을 감고 바람과 파도를 느껴보기도 했었다. 울렁거리던 파도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섬에 도착해보니 소매물도는 정말 작은 섬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모르겠는데 민박집이 몇 군데 있었고, 그 중 어느 할머니를 따라 작은 방 한칸에서 1박을 하기로 했었다. 씻는 곳도 따로 없고, 화장실도 따로 없는 미닫이 문이 있는 천장 낮은 작은 방 한칸이었다. 그 집의 별채 같은 공간이었는데 본채 쪽에는 낚시를 하러 온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 배를 타기 전 마트에서 구이용 불판이랑 삼겹살도 사갔던 것 같다. 술도 몇 병.
주인 할머니께 양념도 빌렸던 기억이 나는데 더 이상 저녁 식사는 기억에서 사라졌나보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은 난다. 언니들이 평소에는 조용하더니 갑자기 왜이렇게 신났냐고 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는 빨간 대형 고무 대야에 받아져 있던 물로 대충 씻고 잤던 것 같다.
그 날은 밤새도록 폭풍이라 할 만큼 거센 바람과 폭우가 쏟아졌다. 잠은 설쳤지만 여행을 더 기억에 남게 해주었던 특별한 밤. 아침에 깨어서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나는 가방 속에서 엽서를 꺼내 빗소리를 들으며 친구에게 엽서를 썼던 것 같다. 방문을 열어놓고 있었는데 쏟아지던 비와 함께 시원했던 공기가 방안으로 들이치던 순간이 생생하다.
그리고 얼마 후, 거짓말처럼 비는 개이고 아직도 기억속에 남아 있는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다 위에 걸쳐 있던 무지개까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인지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정말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 맑은 하늘아래에서 섬을 탐방하면서 나는 계속 '이 섬에서 한 달이고 있을 수 있겠어'를 연신 외쳐댔다. 바다가 잘 내려다 보이는 길 옆 바위에 앉아 책도 읽고 바다도 보고 하늘도 보면 정말 제대로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하늘과 바다가 아직도 눈 앞에 그려진다. 습하고 무더웠던 열기 가득한 공기 속에서!
민박집 할아버지께 3만원을 드리고 소매물도의 등대섬까지 배를 타고 가기도 했다. 1시간 뒤에 오신다고 하시고 떠나셨는데 두 섬을 잇는 바닷길이 열리는 시간도 아니었고 할아버지가 안 오시면 꼼짝없이 섬에 갇히는 거였는데 아무 의심없이 그럴 수 있었던 내가 참 젊었구나 싶다. 할아버지는 시간에 맞게 오셨고 본 섬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다 동굴 구경도 시켜주셨다. 그리고 선착장에서 먹었던 해산물, 하얀 펜션에 살고 계시던 머리 긴 남자 분, 섬 꼭대기에 있던 폐교, 우리를 진주까지 태워주셨던 같은 민박집에 묵었던 아저씨. 글을 쓰면서 흐릿했던 기억이 밝아지면서 마치 함께 여행했던 언니들과 섬에서 만난 그 분들이 섬 선착장에 서서 나를 향해 미소짓는 것만 같다.
벌써 17년 전 일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한 여행의 기억이다.
3. 아이들이 어렸을 때 사이판으로 여행을 갔었다. 아름다운 바다의 색도 정말 인상적이었지만 매일 밤 사이판 중심가를 아이들 손을 잡고 거닐던 그 때의 그 분위기가 기억에 남는다. 수영을 하고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크게 덥지 않았던, 시원한 바람이 불던 거리를 걸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저녁 식사할 식당을 찾아가면서. 만족스러웠던 식사를 마치고 샵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걸어갔는데 바쁜 것도 없고 여유롭게, 샴푸 냄새 나는 상쾌한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걸었던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깜깜한 하늘 아래 번쩍이던 네온 사인과 웃음을 띠고 여유롭게 거닐던 관광객들, 어디선가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람, 쿵짝이는 음악 소리와 함께 샵 앞에서 춤을 추던 사이판 사람들. 이 섬에서 살면 매일 이렇게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사이판에서의 시간이 좋았다. 거리 곳곳에서 맡을 수 있었던 시원한 밤 공기와 맛있게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나는 여행이 좋다. 낯선 곳의 분위기를 느끼는 게 특히 좋다. 코로나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금, 기억 속의 여행을 꺼내어 그 때의 풍경, 냄새를 되살려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앞으로 나는 더 많은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하는 삶, 내 인생의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