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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라 Apr 16. 2020

산부인과에 따라다니는 '굴욕'이란 글자

쿨한 척 말고 진짜 쿨해지자

그냥 산부인과는 어렵다.


결혼한 지 이제 꼭 5년이 돼간다. 나는 딩크족은 아니지만 아이 없이 살고 있다. 지금껏 산부인과에 갈 일이 없었다. 사실 임신을 하든 안 하든 여자라면 정기적으로 가는 게 맞다. 하지만 쉽게 가지 못하겠는 게 현실이다. 그냥 산부인과는 어렵다. 괜히 꺼려진다.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건강검진 때에도 자궁경부암 검사를 하지 않고 넘겨버리곤 했다. 계속 미루다 안 되겠다 싶다. 언젠가는 아이를 낳을 거라 생각하니 더 늦기 전 산부인과에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어제 처음 산부인과에 갔다. 내 생애 첫 산부인과 진찰, 내 나이에 비해 너무 늦은 첫 경험이다.



산부인과 남자 의사 선생님한테 진찰받는 거 어때?


주변 임신한 친구들에게 꼭 물어보게 됐다. "의사 선생님이 진짜 다 보는 거야?", "민망하지 않아?" 대체로 이런 질문에 별 것 아니라는 듯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나중에는 다 괜찮아져." 쿨하게 답하고 다른 말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에는 '어떻게' 그랬고 '어떻게' 괜찮았는지가 궁금한 건데 더 자세히 물을라치면 애처럼 별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이다. 산부인과 진료에 대해 '굴욕 의자'니 '굴욕 3종 세트'니 이런 말이 떠도는 것을 보면 친구의 덤덤한 대답만큼 쿨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왜 아무도 자세히 말해주지 않을까. 모두들 쿨한 척 다 괜찮다, 닥치면 다 한다, 그냥 의사와 환자일 뿐이다 하며 한마디 말로 얼버무리고 그 자세한 이야기는 모두 입을 닫는다. 어떻게 어디를 왜 진찰하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산부인과 그들만의 이야기. 이런 모순적인 현실은 쿨한 듯 쿨하지 않은 '굴욕'이라는 단어에 주눅만 든 채 산부인과는 굴욕을 봐야 하는, 굳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만들어 버린다. 산부인과는 그렇게 멀어진다.


EBS1 '까칠 남녀' 방송 캡처 화면



저게 굴욕 의자야?


이번에는 꼭 가리라 생각하고 병원 검색부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자 선생님이 있는 곳인지 보게 된다. 집 주변 산부인과를 검색하니 여기가 좋다, 저기가 좋다 글이 많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러다 또 미룰까 싶어 사람들 평도 괜찮고 가까운 곳으로 결정하고 예약을 했다. 기왕이면 여자 선생님이었으면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남자 선생님에게 진찰을 받게 되었다. 애초 남자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는 게 꺼려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예약 전화를 걸 때 어차피 의사가 하는 진찰일 뿐, 남자도 여자도 상관없다고 쿨한 척하기로 했다. 이러다 또 못 갈까 싶어 뭐 어때 하며 예약을 해버렸다.

사실... 쿨하게 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무지 많이 마인드 컨트롤한 것이다.


산부인과에 가기로 한 당일.

가기 싫다. 내가 왜 예약을 했을까 후회가 밀려오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병원에 갈 준비를 하면서도 자꾸 멍하게 생각이 복잡하다. 그동안 그토록 산부인과에 가기 꺼렸던 이유, 선생님이 남자다. 괜.. 찮.. 을.. 까...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의사 선생님을 보러 가는 마지막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의사 선생님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내가 산부인과 진찰이 처음이라고 하니 편하게 대해주신다. 내가 얼마나 불편할지, 얼마나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왔을지 아는 것 같다. 간호사 선생님에게 검사실로 안내하라는 말 끝에 처음이시니 잘 안내해주라는 말도 덧붙이신다.


내가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하고 싶었던 것은 내 자궁 상태 건강이었다. 자궁경부암, 자궁근종 등을 검사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흔히 말하는 그 굴욕 의자에 앉아야 하는 것쯤은 알고 왔다. 큰 치마를 입고 하의를 모두 벗고 나오자 마주한 그 굴욕 의자. 간호사 선생님이 어떻게 앉는지 설명해준다. 친절한 음성 위로 내 안의 외침이 오디오가 겹친다. '아 정말 미치겠다!' 내가 의자에 앉자 의자는 선생님이 진찰하기 좋은 각도로 젖혀지고, 의사 선생님이 잘 볼 수 있도록 치마도 걷혔다. '으악 정말 미치겠다, 이 자세라면 여자 선생님 앞에서도 부끄럽겠다!'



굴욕... 일까?


모니터에 나오는 내 자궁 상태를 이리저리 설명해주신다. 의사 선생님께서 어떤 것을 가리키며 난소라는데 잘 보이지는 않는다. 괜찮다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막상 진찰을 받으니 부끄러움도 한 때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것 의사 선생님께 평소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모니터에 비친 내 자궁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선생님도 최대한 내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다 끝났다. 휴. 별거 아니네.


'굴욕'이라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면 남에게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뜻이다. 수치스럽고 모욕을 당한 느낌이 들 때 주로 쓰는 말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굴욕 의자에 앉아 업신여김을 받거나 수치스럽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 의자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는 5초의 시간,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당황스러웠던 건 사실이나 당황스러움이 굴욕은 아니다. 사실 병원 안에서의 권력관계라고 하지 않나. 병원은 환자가 아무리 권세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의사 선생님 앞에서 초라해지는 곳이다. 내과는 내과대로, 외과는 외과대로, 치과는 치과대로 진찰할 신체의 어떤 부위든 의사에게 보여야 한다. 이상한 포즈가 나오고 다소 불편해도 의사에게 잘 보이도록 우리는 평소 하지 않는 포즈로 의사 선생님 앞에서 소견을 기다린다.


그러니 산부인과에서 여성의 생식기를 진찰하기 위해 최대한 기능만을 생각해 만들어진 게 소위 말하는 그 '굴욕 의자'인 것뿐이다. 우리가 그 의자에 굴욕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굴욕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굴욕을 당하고만 꼴이 된다. 그 의자는 굴욕 의자가 아니다. 그냥 진찰 도구일 뿐. 괜히 굴욕이라는 단어가 여성에게 산부인과를 두려운 곳으로 만든다. 산부인과는 그렇게 겁을 먹고 꺼려서는 안 되는 곳인데 말이다.


병원 데스크에서 수납을 하자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배려해서인지 여자 의사 선생님 진료시간을 알려준다. 지금 진찰해주신 선생님은 언제이신가요? 내가 필요한 정보를 한 번 더 묻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그렇게 진찰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마치 큰 숙제를 마친 것 마냥 홀가분하다. 산부인과에서 진찰받기 꺼리는 친구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진찰 과정에 의사 선생님은 우리가 검사받고 싶어 하는 자궁을 열심히 봐주시고 이상이 없는지 친절히 설명해주신다고 말이다. 치과에서 입을 벌리고 누워있는 것처럼 산부인과에서도 의료용 의자에 앉을 뿐이라는 설명도 덧붙여서 말이다.


겁먹지 말고 가보라. 우리 몸을 사랑하는 만큼 정기적인 산부인과 검진이 꼭 필요하니까.


앞으로 산부인과를 대할 때 굴욕이란 단어는 담지 말자. 애써 쿨한 척 말고 진짜 쿨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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