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좋지만 외로운 것은 싫어
날씨가 한창 좋던 지난 5월의 평일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점심시간 혼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를 살짝 취하게 만든 카페인 때문이었을까. 기분 좋게 살랑이며 볼에 와 닿았던 햇살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때문이었을까.
멜로디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고 엇박에 맞춘 스텝이 걸음걸이를 가볍게 한다. 같은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 눈치 못 채게 손가락을 까딱까딱, 비트에 박자를 맞춘다. 이 기분 그대로 길 한복판에서 그저 춤을 추고 싶다. 흥이 난다. 하지만 지금은 점심시간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가는 길, 흥을 낼 타이밍이 아니다. 지금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나의 페르소나를 접하는 시간, 회사원 P 씨일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회사 건물 앞 날씨 좋은 날에 뜬금없이 신랑이 생각난다.
그 사람은 맥락 없이 오른 내 흥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내 흥대로 몸을 한껏 흔들고 나면 둘이 한껏 웃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혼자 웃음이나 입을 헤벌쭉하게 벌리고 킥킥댄다.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 무표정하게 사원증을 찍고는 회사로 들어간다. 곧 다시 마주할 직장 동료들은 모르는 회사원 P 씨의 흥을 꾹 누르면서.
나는 점심시간 혼자 사무실과 조금 떨어진 카페로 가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들어오곤 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점심을 가끔 함께 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나 혼자 점심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천성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체질에 맞지 않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이다. 잠시 이 시간만큼은 가식적으로 올린 입꼬리에 힘을 뺀 채 책을 읽든 미드를 보든 이도 저도 싫으면 그냥 멍하게 앉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내 생애 첫 사회생활이었던 유치원에 처음 가게 되었을 때, 그 당시 유치원 등원은 내게 정말 큰 난제였다. 선생님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아이였던 나는 친구들을 사귀지도 못해 빤히 내 앞에 있는 아이만 바라보며 눈만 끔벅댈 뿐이었다. 선생님하고 이야기 잘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는 아이들이 어린 맘에도 대견해 보였다.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늘 새 학기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친구를 사귀지, 아는 사람 없는데, 나 혼자 친구 없이 지내는 건 무서운데 두려운데...’ 약간의 스트레스와 대충의 눈치로 어떻게든 친구를 사귀고는 했지만 확실히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구들에 둘러싸여 쉽게 친구를 사귀는 아이들이 마냥 부러웠다.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두 가지 장치, ‘술과 이성관계’. 이는 또 다른 새로운 변수로 어릴 적 소극적이던 모습에서 조금 탈피하게 도와준 장치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만남을 두려워하는 낯을 많이 가리는 어른일 뿐이다.
이런 성향 탓에 자책도 하고 고민도 해봤지만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건 고칠 필요가 없는, 아니 고칠 수 없는 타고난 내 성향이다. 지금은 그럭저럭 적응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혼을 결심했다. 연애를 해봤는데 영 내 체질과 맞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저녁에 집에서 혼자 맞이하는 내 시간이 더 좋았다. 점점 연애도 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행복에 빠지기 시작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시 결혼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결혼을 한지 벌써 5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 시절 비혼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결혼을 해서 좋다고 느끼며 살고 있다.
혼자인 것은 좋지만 외로운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도 혼자인 것을 좋아하는 내가 늘 혼자 있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는 혼자인 것을 좋아하지만 외로운 것을 싫어하는 반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개인적 인간관계로 넓히지 못하는, 사교성이 제로인 인간이지만 나와 마음이 맞고 대화를 나눌 사람을 갈구하던 인간이기도 했다. 나는 친구 이상의 가족이 필요했던 그런 인간이었다.
혼자 하는 삶이 좋았던 것은 그 이면의 내 이중성을 몰랐기 때문이었고, 그 사이 나도 모르게 나의 정서에는 외로움의 감정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분명 혼자 보내는 시간이 가장 좋았지만 반면에 외로운 것은 또 싫어하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이중적인 내향인’인 나는 혼자일 때보다 둘일 때 더 좋았다.
인간관계에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나이기에 결혼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만약 내가 외향적이고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내가 결혼에서 얻는 ‘나만의 의미’는 반감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유일하게 나의 이면을 보일 수 있는 사람. 아무에게 쉽게 못하는 내 속 깊은 이야기를 눈치 보지 않고, 나를 포장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흥이 나면 흥이 나는 대로 흥이 사라지면 흥이 없는 대로 대해도 그런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런 행복이 결혼에서 느끼는 ‘나만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만큼은 결혼해서 좋다. 행복하다.
신랑에게 카톡을 보낸다. “점심시간 갑자기 춤 당김”
잠시 후 온 신랑의 카톡. “못다 푼 흥은 잠시 후 집에서”
8층에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끈다. 다시 회사원 P 씨가 되어 또각또각 사무실로 향한다. 아무도 모르는 진짜 내 모습은 잠시 감춰둔 채 책상에 앉아 남은 일정을 시작한다. 퇴근이 더 하고 싶은 오후다.
그대와 나의 세상. 커밍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