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택배가 왔다.
보풀제거기를 쓰다가 옷에 구멍을 낸 적이 있다. 남편이 아끼던 낡지만 예쁜 니트였는데 잘해준다고 했던 것이 미안하게 되었다. 비슷한 옷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 뒤로 구멍이 자꾸 떠올라 거침없던 보풀 제거의 즐거움이 감소되었고, 보풀제거기가 고장 난 뒤로 옷에 보풀이 일어나도 무심히 걸치고 다닌 게 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급하게 보풀제거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절대 구멍을 안내는 녀석이 있으려나? 한참 손가락품을 팔아 전에 쓰던 것의 세배 값을 하는 기계를 주문한 게 며칠 전이었다. 박스에 꺼내자마자 초록색 카디건을 벗어 보풀을 밀었다. 괜찮은데? 하지만 저번 것보다 세배 비싸서인지, 내가 세배 더 조심스럽게 칼질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잉지잉. 투명 플라스틱 통에 보풀이 금세 수북이 들어찬다. 점점 새것처럼 변해가는 옷에 감탄하며, 동생에게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
배송 오자마자 대작업 중 ㅋㅋ
보풀 진짜 많다...
따봉 이모티콘을 받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동생을 안심시켜야 했다. 초록색 카디건은 요즘 매일 입는 옷인데 동생과 쇼핑 가서 엄마 카드로 지불한 사연 있는 옷이다. ‘언니 옷 좀 골라줘라’는 엄마의 특단 조치가 있었다. 지방에 사는 나의 서울 쇼핑이었다. 서울의 쇼핑센터는 내 기억보다 더 다양해지고 많아졌다. 괜찮은 옷 서너 벌이 십여만 원 정도. 내가 충분히 지불할 수준이지만 나 혼자 그런 쇼핑이 참 어색하다. 일을 그만두고 전보다 더 무신경해진 내 복장에 엄마와 동생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동생이 골라준 옷은 늘 좋았다. 타지에 산지 십여 년 되었으니 꽤 오랜만에 둘이 떠난 쇼핑이었다. 못 이기는 채 넙죽 받아 매일 같이 입은 옷이 여기저기 쓸려 올이 풀리고 보풀이 생겼다. 얼마 전 그런 채로 입고 서울에 갔다가 한소리 들은 터였다. 엄마와 동생은 이 옷에 그만한 지분이 있으니, 순순히 민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보풀이 안 일어날 재질 같아 보였는데’ 하는 동생이 빠진 올을 챙겨 온 뜨개바늘로 넣어 주었고 보풀은 제거기가 없어 여태 미루며 입고 다니다가 이제 하게 됐다.
누군가 아침마다 건네주는 옷을 입고 살고 싶다. 적어도 나보다 더 잘 고르겠지. 교복이나 도복같이 매일 같은 옷을 입던 시절이 종종 그립다. 한편, 한번 마음에 든 옷은 계속 입어 너무 낡아 버릴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된다. 자주색 코트가 있었는데, 동생의 이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언니, 그 옷 언니 피부였잖아.’ 그때도 민망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옷 구경은 즐겁다. 나 역시 좋아했다. 아니 지금도 좋아한다. 아니 내게 다소 피곤한 일임을 이제 인정하련다. 공들여 고른 예쁜 새 옷을 몇 번 입고 나면, 처음 느낀 예쁨이 사라지고 질리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러면 사라진 설렘의 자리에서 당황하며, 옷 한 벌이 그렇게 금세 안 예뻐지는 데에 대한 실망감이 옷 고르는 기쁨을 압도해 갔다. 이 옷은 계속 괜찮을까? 나를 곧 실망시키겠지? 너무 비싼 것 아닌가? 이런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쇼윈도 너머 옷들을 또다시 열망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지난달 서울에 갔을 때, 결혼 3년 차 새댁으로 사는 동생의 이런 말을 들었다.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 말려서 차곡차곡 개어 옷장에 넣을 때, 뭔가 해낸 듯 뿌듯하고 행복해.”
새로 산 옷의 낡아짐에 실망감이 컸던 나는 산 옷을 관리하기보다 새 옷을 더 갈망했다. 내 옷장은 보잘것없는 옷들로 차있고, 빨래와 정돈은 해야만 하는 싫은 일인데. 빨래 건조대에 며칠을 두다가 오늘 입을 옷을 집어 드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나와 이렇게 다른 사람이 내 동생이라니!
보풀을 밀어낸 초록색 카디건은 새 옷처럼 산뜻해졌다. 아들이 좋아하는 검은색 후드티에도 보풀이 많던데 한번 밀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건조대에 마른 옷들을 가져와 앉았다. 평소와 다르게 옷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아 개며 동생의 말을 떠올린다. 옷들 사이로 산뜻하게 밀어내고 싶은 내 낡은 마음이 보인다.
※ 동생의 보풀 제거 꿀팁
보풀제거기를 쓸 때 너무 꾹꾹 누르지 말고 위에서 슥슥 지나간다고 생각하고 여러 번 해야 됩니다. 꾹 누르거나, 잘 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면 구멍 뚫릴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