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의 오래 걸리는 실험_두울
오늘 리리는 수납장을 비워보기로 했다.
(초로색으로 표시한 칸만 정리하기로. 너무 많이 하면 곤란하다)
일단 위칸에는 작업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공연 대본들과 포스터, 리플릿, 계약서, 투명파일 등등.
그리고 아랫칸은
'리'가 찍은 사진 액자와
'리'의 외할머니께서 주신 소쿠리 등이 있다.
사진에는 안 나와있지만
수납장 위에 쑤셔 넣은 종이박스까지,
전부 꺼내 거실 바닥에 늘어놓았다.
자, 이제 정리를 해볼까.
'리'가 종이박스를 열자
그 안에는 '리'가 찍은, 인화된 사진들로 가득했다.
지난 전시퍼포먼스에서 쓰인 사진들이기도 했다.
'리'는 사진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흥분한 듯 보였고 혼란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 모습은 마치..
내가 호기롭게 수납장에서 모닝페이지로 썼던 노트들을 꺼낸 후
느꼈던 감정과 비슷해 보였다.
'리'는 '언젠가 우리가 카페를 하면..'이라는 말로
비우기를 유보하려고 했다.
(카페에 대한 계획은 막연함)
나는 '리'를 일으켜
수납장에 붙여놓은
<미니멀을 위한 판단기준>을 함께 읽어보자고 권했다.
(시작하기 전 읽어보면 정말 도움이 된다)
'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함께 정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고민이 되는 건 '보류존'으로 옮겨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작업과 관련된 대본, 포스터 등을 정리할 때
몇 번을 훑어보고 만지작 거리기 일쑤였고
특히 해외공연을 갔을 때 챙겼던 축제 포스터와,
함께 창작 활동을 하며 만든 리플릿에서 마음이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지난날, 우리의 시간을 정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쉽기도 하고
언제든 꺼내볼 수 없다는 생각에 자꾸만 멈칫거렸다.
'언젠가'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늪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작업의 결과물로 가득 찬 수납장을,
이 집에서 지낸 3년 동안 열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니
이 정도면 정리하는 게 맞지 않나?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달라져 있으니
지난 시간이 담긴 물건을 빼곡하게 품은 채 나아갈 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우리는 갑자기
'버려, 버려, 버려!!!!'를 외치며
빠른 속도로 정리해 나갔다.
그럼에도 '이건 진짜..' 하는 것들도 있었는데
휴대폰 사진에 옮겨 놓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정리가 끝이 났다.
우리가 남겨놓은 건,
'리'가 제주에서 산 책갈피
혼인신고 접수증
'리'의 외할머니가 주신 소쿠리
특정 야생동·식물보호 특별 우표인 금개구리 우표
태국여행 때 숙소의 마마께서 선물해 주신 작은 불상
아쉬탕가 요가책
연기서적 2권
히사이시조 'summer' 악보가 든 파일
내가 처음 쓴 희곡을 낭독공연으로 선보인 후 관객에서 받은 피드백
육각렌치와 자전거 자물쇠 2개, 자전거 전조등
제주에 계신 작가님께서 찍어주신 나의 사진 1장
'리'의 어린 시절 사진 여러장
우리가 창작하면서 만든 리플릿 1장과 대본집 1장
증빙용 공연 리플릿 1장
증빙용 공연 계약서 여러 장.
(증빙용은 증빙이 완료되면 정리할 예정이다)
정리하고 보니,
(감격스럽다)
'이렇게 하나하나 비우고 나면
다음으로는 커다란 가구들이 보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먼 얘기)
오늘은 여기까지.
리와 '리'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오늘의 비우기를 마무리했다.
속이 다 시원하다!
다시 한 번, 뿌듯한 사진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