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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tsbie Jul 27. 2018

[서평] '위플래쉬' 속에 숨겨진 피로사회

위장된 디스토피아

긍정적 프레임

  사람들은 흔히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선한 인물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나 역시도 위플래쉬를 처음 보고 난 뒤, 결말 부분에서 앤드류가 엄청난 드럼실력의 향상을 일궈내고, 그를 보며 미소 짓는 플래쳐 교수 모두 본인이 원하는 바를 성취한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결말의 주인공의 표정만으로 해피엔딩으로 치부하기에는 위플래쉬의 여운이 너무나도 짙게 남아있었고, 나는 다시 한 번 더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본 후 새롭게 느껴진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가장된 비극적 결말이었다. 내게 작용하던 주인공에게 맞춰진 긍정적 프레임이 벗겨진 순간이었다.


영화 엔딩에서, 본인의 기량을 넘어서는 드럼 연주를 선보인 후 미소를 짓는 주인공 앤드류.
영화 엔딩장면에서, 연주를 하는 앤드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주를 복돋아주는 플래쳐 교수


 영화를 보며 느꼈던 주인공들의 목표 추구와 성취라는 긍정성 속에 위장되어 있던 부정성들을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를 인용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또 주인공 앤드류의 내면이 플래쳐 교수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이 우리 사회구조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전제하겠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시작하기 전 책 속의 핵심 개념인 규율사회와 성과사회의 개념들을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규율사회는 명령과 금지가 팽배한 부정성의 사회이다.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는 지배적인 조동사 하에 개인은 강제성의 억압을 받는다. 이와 대비되어,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우리 사회는 성과 사회이다. 성과사회는 자율성을 강조하는 사회로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 조동사를 외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행위의 동기가 되는 것은 외부의 강압성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의지뿐이다. 

     




복종적 주체

 영화의 첫 장면, 불이 희미하게 켜져 있는 검은 방에서 더블 타임 스윙을 연습하고 있는 앤드류에게 다가가는 플래쳐 교수의 시선으로 장면이 전개된다.


 플래쳐 교수를 만나기 전, 앤드류는 자신의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 채, ‘보조 드러머’라는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연습량을 하는 평범한 드러머였다. 그런 그를 눈여겨 본 플래쳐 교수는 자신의 스튜디오 밴드에 영입한다. 소위 말하는 신분상승처럼, 셰퍼 음악학교 내의 자신의 위상이 올라간 앤드류는 높아진 자존감과 함께 부여된 역할에 대해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다. 앤드류를 스튜디오 밴드의 일원으로 인정한 것은 플래쳐 교수였고, 앤드류는 그런 교수에 대한 동경과 함께, 자신을 드러머로 인정해준 데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레슨시간, 플래쳐 교수는 ‘자신의 박자’에 맞게 215박자를 연주하라는, 자의적이고도 강제성이 다분한 명령을 내리며 앤드류에게 채찍질(whiplash)를 가한다. 앤드류는 교수가 말하는 박자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고, 교수는 그에게 체벌을 가한다. 첫 레슨부터 스튜디오 밴드 앞에서 엄청난 모욕을 당한 앤드류. 그럼에도 앤드류는 드럼채를 놓지 않는다. 오히려 손에 피가 날 정도로 많은 연습을 한다. 

 플래쳐 교수는 스튜디오 밴드를 이끌어나가는 절대적이고 강압적인 지배기구와도 같다. 앤드류는 스튜디오 밴드로서의 소속감을 느낀 이상 그에게 복종하고, 그의 기준과 명령에 흡족하기 위해 발버둥 치게 된다. 비록 교수가 지도하는 밴드가 강압적이고 통제적이라 할지라도 앤드류는 체제에 순응하기 때문에 교수의 기준에 맞춰 연습을 계속하는 것이다. 

     

체제와 순응에 최대 가치를 두는 세계를 그려낸 조지 오웰의 '1984'


패러다임의 전환 - 인센티브의 등장

 앤드류는 스튜디오 밴드에 적합한 드러머가 되기 위해 수많은 연습을 했고, 그 결과 메인드러머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 메인 드러머가 된 앤드류는 우월감과 성취감으로 가득 찬 자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플래쳐 교수가 코넬리라는 또 다른 메인 드러머 후보생을 데려 오면서 상황은 전환된다. 


 교수는 코넬리를 훌륭한 연주자라고 치켜세우며 앤드류에게 누가 주 연주자가 될 지는 아무도 확언하지 못한다며 위기감을 조성한다. 교수는 상대 경쟁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은근하게 앤드류에게 지금의 능력치보다 더 큰 능력을 이끌어 내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영화 뒤에서 교수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코넬리는 앤드류에게 인센티브와 같다. 인센티브란 구성원의 성과창출을 촉진하기 위해 업무 목표달성에 부응하여 제공하는 유인책을 의미한다. 즉, 코넬리는 앤드류의 성과창출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한 유인책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에게 느낀 위기감을 바탕으로 앤드류는 더욱 더 연습에 몰두한다. 


 그리고 이때, 앤드류의 내면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 교수의 “~해야 한다”는 기준에 맞춰 자신의 최대치를 끌어냈던 앤드류는, 다른 드러머와 상대 경쟁 상황에 놓인 때에, 그보다 더 높은 능력 성취를 요구받게 된다. 이를 위해 앤드류는 본인의 생산성의 최대치를 뛰어넘은 단계까지 자신에게 끊임없이 박차를 가하고, 이 때 앤드류에게 필요한 조동사는 “~할 수 있다” 라는 긍정적 조동사이다. 능력이 한계 없이 향상할 수 있다는 믿음은 앤드류가 계속된 연습과 성취를 추구하게끔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앤드류의 내면은 긍정의 도식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규율사회가 성과사회로 바뀌면서 일어난 심리적, 공간구조적 변화가 있듯이, 앤드류에게도 많은 변화의 균열이 일어난다.

     

변화의 균열 1 - 자유로운 강제(심리적 변화)

 기존 지배기구에 순응했던 복종적 주체와는 달리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이 자유는 강제와 일치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미 능력의 최대치를 느껴 본 앤드류는 본인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할 수 있다’는 긍정적 도식을 내면화 하며, 보다 더 큰 성취를 욕망하고 있다. 결국 엄청난 노력으로 다른 드러머들을 제치고 메인드러머 파트를 꿰찼지만, 공연 날 리허설에 지각한 앤드류에게서 교수는 파트를 빼앗는다. 


메인드러머 자리가 뺏기자, 분노하는 앤드류


 성취 추구라는 본인의 욕망이 타인에 의해 좌절되자, 앤드류는 “당신은 내게 그럴 수 없어”라며 플래쳐 교수에게 악을 쓴다. 이는 지배기구의 붕괴를 암시한다. 더 이상 앤드류에게 행위의 촉발제는 플래쳐 교수가 아닌, 앤드류 자신뿐이다. 이제 앤드류는 교수의 규율로부터 벗어나 본인이 추구하는 성취를 위한 무한한 긍정성을 동기로 삶을 영위해나간다. 하지만 타인이 부여한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자유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 성과 주체들은 나의 의지에 따라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속에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강제성이 숨겨져 있다.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한다’ 는, 강제성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또 다시 자신이 부여한 강제성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변화의 균열 2 - 인간적 유대관계의 상실(공간 구조적 변화)

 성과 주체는 성과 사회 시스템 속에 내재된 폭력성에 맞닥뜨리고, 시스템의 폭력성은 주체의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 결국 성과주체는 본인의 성취를 위해 인간적인 유대의 끈을 끊어버리는, 개인적 인간관계의 공간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아 플래쳐 교수는 성과 사회 시스템에 내재된 폭력성과도 같다. 교수는 앤드류를 메인 드러머로 세운 이후에도 계속 해서 다른 드러머 후보생을 데려와 앤드류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가 뺏길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일게 한다. 한 번 실수하면 즉시 기회를 빼앗아 더 나은 생산성을 올릴 만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최대치의 생산성 그 이상을 요구하는 성과사회의 단면이다. 성과주체가 자기 착취와 끊임없는 성취 욕구에 빠질 만한 환경을 조성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폭력성은 앤드류에게 불안감을 만들어 내, 주변의 유대관계까지 스스로 끊게끔 한다. 자신의 여자 친구 니콜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장면에서 자비와 인간성이 말소한 채 마치 경주마처럼, 자신의 성취에만 몰두한 앤드류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니콜이 외치는 “What's wrong with you!”라는 말은 앤드류 개인에게만이 아닌, 성과 주체, 사회 개개인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과사회의 시스템에 의해 파괴된 인간적 유대의 결핍은 성과 주체를 더욱 더 자기 착취로 내몰게 되고, 이는 성과 주체 본인이 자초한 일으로써 자신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는 것일 뿐이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 유대 관계의 상실은 성과 주체를 우울증으로 몰고 갈 뿐이다.

     

위장된 디스토피아

 영화의 마지막, 교수가 초청해준 무대에서 앤드류는 전례가 없을 훌륭한 솔로연주를 해내며 살며시 미소 짓고 연주를 마무리 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끊임없는 욕구 성취와 연습 끝에 엄청난 실력 향상을 이끌어 낸 앤드류. 이 결말은 과연 해피엔딩인 것일까? 앤드류는 천재적인 드럼 실력으로 위대한 드러머가 되어 성취하는 바를 모두 이룬 위인이 될까? 아니다. 그는 또 다른 성취를 위해 자신을 착취할 것이고 또 그 성취를 이루어 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성취를 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를 것이고, 그때 그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상실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까지 이어진다. 

 [위플래쉬] 데이미언 셔젤 감독도 비하인드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아마도 영화의 포스트스크립트는 “앤드류는 슬프고 공허한 빈 껍질 인간이 되어 30의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었습니다.” 가 될 것이다.

 결국, 성과사회는 성과 주체의 발전을 일궈내는 듯해 보였던 위장된 디스토피아였던 것이다. 성과 사회는 개인의 인간성의 몰살을 이끌어 낸다. 절대 날개가 꺾이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을 몰아치던 성과사회의 시스템 속에 시달리다가 한 번 날개가 꺾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타인에 뒤쳐져 낙오자가 되었음을 느낄 때 앤드류는 우울증이라는 병리적 상황에 놓일 것이다. “할 수 없는 게 없다”는 성과 사회는 “아무 것도 못 하겠다”라는 우울증의 사회로 번역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재즈 드럼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앤드류, 제 2의 찰리 파커를 가지기 위해 상상을 뛰어넘는 강압성을 보였던 플래쳐 교수. 비정상적인 두 인물이 등장하는 위플래시는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렇다 해서 현실을 부풀린 작품은 아니다. 자유라고 위장된 강제성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어느 누구도 구제해 줄 수 없는 성과 사회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감독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자 노력했고, 이 영화는 성과 주체의 삶에서 자기 착취로 치닫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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