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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Feb 20. 2017

#0, 사장딸과 싸우고 도망치다

그게 왜 시코쿠였을까

길, 바닷길과 하늘길을 포함한 길로 대변되는 여행, 그리고 그 부산물이었던 사진!

철들 무렵부터 내 인생의 화두는 이 둘로 고착되어 갔다.


죽을만큼 아팠던 젊은 날의 사랑도 세월이 치유해줬고 돌아보면 유치하기까지 했다.

결혼이라는 흙탕물에 발을 담그고 싶지도 않았다.

좀 더 정직하자면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의 가족, 친구, 사회로부터 고립시켜서 나만의 것으로 둘 수 없는 바에는 내가 그 언저리속으로 들어가서 부대끼고 싶진 않았다.

그건 못할 짓이지 않은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나를 구원하고 나를 치유하는 건 언제나 여행이었다.


마흔을 넘기고부터는 쉽게 일상을 등지고 훌쩍 배낭을 꾸렸던 2~30대보다는 신중해졌다.

불혹을 넘기고도 이룬 것 하나없이 언제까지나 카르페디엠!을 외칠수는 없었던 거다.

심심찮게 독거노인들의 고독사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즈음, 남일 같지가 않기도 했다.

나홀로 쪽방에서 끼니를 걱정해가며 노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정도 노후대비를 한 후에, 그래도 체력이 남아있을 40대 안에 꿍쳐둔 마일리지를 꺼내 라운드더월드티켓을 끊어 세계일주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를 견디고 일년을 견디고 회사를 견디고 있었다.


남미여행을 마치고, 놀만큼 놀았으니 이제는 또 비축을 시작해야지 하면서 입사했던 연매출 50억 남짓인 중소기업, 알고보니 곳곳에 오너 일가가 지뢰밭처럼 포진해 있었다.

내실보다 외형에만 치중하던 대표는 공공연하게 능력에 앞서 충성심이라며 손바닥을 비벼대는 직원만 대우했다.

비위가 좋질 않으니 가급적 눈에 띄지 않는 걸로 조용한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중 사건이 터진거다.

지뢰밭 중 하나인 같은 부서 사장 큰 딸X과 한바탕 신나게 언성을 높이고는 그 길로 사표를 던져버렸다.

구차하게 마지노선인 자존심까지 구겨가며 생계를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악천후속에서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출근을 3년 버텼으니 폭발시점이 오기도 한거다.

40대 후반으로 계획한 세계여행엔 차질이 생겼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가기로 했다.


지쳐있었다.

남들 다 멀쩡하게 감내하는 직장생활에서 나는 늘 생채기를 입었다.

일보다는 사람에 치이고 상처받고 아파하면서, 남보다 더 날새우며 스스로를 방어하면서 그렇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나날이 지쳐갔다.

그런 전쟁터로 곧바로 재출전하긴 싫었다.


쉬어가는 김에 이번엔 걷는 여행으로!


늘 꿈꿔왔던 산티아고를 갈까, 가까운 시코쿠를 갈까.

종교적인 이유라면 산티아고가 유력했지만 1000키로 이상 걷는 여행이 처음이다보니 완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쉽게 돌아올 수 있는 시코쿠를 먼저 가기로, 얼만큼 걸을 수 있을 지 테스트삼아보기로 했다.




* 시코쿠는 일본의 4개의 큰 본섬중 가장 작은 섬으로 혼슈와 큐슈 사이에 위치한 제주도의 약 10배 크기 섬이다. 도쿠시마,고치,에히메,가가와의 4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코쿠순례길은 진언종의 창시자 코보대사의 족적을 따라, 섬의 동쪽(도쿠시마)에서 시작해서 남쪽(고치), 서쪽(에히메), 북쪽(가가와)을 돌아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불교순례길이다.

1번부터 88번까지의 88사찰을 도는 원형 순례길로 약 1200km, 20여개의 번외사찰까지 합치면 1400km가 넘는 거리이다.


2015년 10월 13일부터 11월 26일까지의 대장정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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