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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r 30. 2017

#09, 걷고 걷고 그냥 걷고 또 걷고

수행의 도장, 고치현에 들다 (for #24)

2015년 10월 22일 목요일 매일 맑음


ふれあいの宿 遊遊NASA(유유나사 후레아이노나도) - 33km - 民宿德増(민슈쿠도쿠마스)


일출이 깨워주는 아침!


잠자리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어제 예상한 대로 묵은 방에서 바로 일출이 보인다. 10월 하순에 접어 들었는데 6시 15분쯤에 해가 뜨는 걸 보니 확실히 우리나라보다는 조금 빠른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도 카메라로도 찍어보지만 구름층이 있어서 좋지는 않다.

아침 먹으러 내려간 1층 식당에서도 일출이 보인다. 숙소가 전망좋은 곳에 참 잘 자리잡았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이 33킬로, 가장 길게 잡은 거리다. 도중에 절에 들를 일도 없고, 어제 31.4킬로를 2시 반에 마쳤으니 무리한 여정은 아닐거라고, 좀 더 여유를 부리면서 느릿느릿 걸어봐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침을 제대로 먹고 7시에 체크아웃한다. 오늘은 쭉 55번 국도를 따라가는 노선이다. 어제 걸어 본 결과 55번도 도심지가 아니니 차량운행이 많지 않아서 걸을 만 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바다 곁에서 걸을 테니 힘들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빈둥거려 봐도 좋겠다.


오헨로미치에 그래도 띄엄띄엄 오헨로상들이 보인다. 헨로 복장을 하지 않은 젊은 남녀 한 쌍 외에 나머지는 혼자 걷는 초로의 어르신들이다. 85킬로를 2박 3일간 걷는 외로운 길인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이 길만 길이 아니니 1200킬로 동안 은퇴 후의 삶을 설계라도 하는 걸까.

나는, 이 길에 적응이 되어가는 듯 하다. 이제까지는 힘만 들었는 데 이제부터는 생각이란 걸 해 볼 수도 있겠다.


오늘도 역시나 터널이다. 몇 개 쯤일지 아직은 모르겠는 아침 시간에 장장 638미터의 미코토터널(水床トンネル)을 만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터널을 빠져나오니 바로 고치현이다. 'ようこそ高知県へ'를 보니 도쿠시마현이 끝났다는 걸 실감한다. 23번 절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어서 칸노우라다리(甲浦大橋)를 건너면 민슈쿠, 료칸, 호텔이 즐비하다.

또 한참을 걷다보니 번외영장 메이토쿠지(明德寺)쪽으로 헨로미치가 대로를 우회해서 들어간다. 번외 사찰을 일삼아 돌지는 않아도 메이토쿠지와 노네하치만궁(野根八幡宮)이 가까이 있으니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고즈넉하니 옛 유적을 잘 보존해 놓아서 나름 볼 만하다. 아루키헨로상들도 자주 눈에 띈다.

유적을 뒤로 하고, 노네대교(野根大橋)를 건너면 비로소 고치현의 도요초(東洋町)에서 무로토시(室戶市)로 넘어 간다. 24번 호츠미사키지가 그리 멀지만은 않았다는 의미지만 85킬로 중 절반이나 닿았을까 싶다.


태평양을 가까이에 끼고 걷는 길은 파도가 무서울 정도로 드높다. 먼 바다에 태풍 소식이 있긴 한데 비껴갈 지도 모르고 다가올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날 좋은 날에도 이 정도로 높은 파도라니, 쓰나미라도 몰려온다면 어떠할 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방파제가 우리나라보다 두 배, 세 배 이상 드높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카메라가 먼저 지쳐서 떠나 버리네


11시쯤, 방파제가 비교적 낮고, 검은 자갈과 바위에 부딪치는 하얀 포말이 이쁘길래 간만에 카메라를 셋팅하고 조리개를 최대한 조여서 장노출이라도 잡아볼까 싶지만 ND필터는 없고 날은 맑아서 셔터스피드가 못 미친다. 그리고, 그게 무슨 무리라도 된 양 카메라가 정말로 나가 버리신다. 

무로토시에 가서 집으로 돌려보내든 도쿄로 수리보내든 무슨 수를 내야겠다. 


5000엔에 이틀 숙소와 먹거리가 해결! 이런 세상도 있었어


카메라가 없으니 두시간을 눈요기만 하면서 힘없이 걷고 있는 데 앞에서 오헨로상 한 명이 다가온다. 처음 만나는 사카우치헨로(오헨로미치를 88번 절부터 1번 절까지 역으로 도는 순례자로 대부분 몇 번을 반복해서 오헨로미치를 도신 분들이 많음)상이다. 

초로의 남자분, 이 분께서 나에게 명함 한 장을 쥐어 준다. 타비노야도 미소노라 되어 있는 명함에는 1박에 2000엔, 여기다 500엔을 더하면 2식이 따라온다고 되어있다. 이 분께선 이곳이 너무 좋다고, 안주인이 영어도 잘 한다고 꼭 묵어보라고 한다. 위치를 보니 모레 쯤에 묵을 수 있을 만한 곳이다. 

참 선해 보이는 분의 추천이라 바로 전화를 해서 모레 묵기로 하고 통화를 끝내려는 데 미소노의 안주인이 내일은 어디서 묵을 지 정했느냐고 물어본다. 25번 신쇼지 앞의 비지니스료칸 다케노이에 스도마리로 예약은 한 상태였지만 취소해도 될 것 같아서 괜찮은 곳이 있겠냐고 하니 바로 신쇼지 근처에 코우신노야도라고 비용은 자기네와 비슷할 거라며 본인이 전화해서 예약을 해주겠단다.  꼭 이다도시 아줌마 같은 말투로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얘기하는 이 분 참 활기넘치기도 하다.

어쨋든 이틀의 숙소가 해결되니 마음은 편하다. 다케노이에 전화해서 취소하고, 다시 느릿느릿 오늘은 어제만큼 속도가 나질 않는다.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


그래도 어느 덧 민슈쿠 도쿠마스의 직전 마을 사키하마쵸(左喜浜町)에 들어선다. 아주 작은 어촌마을로 고래관찰소가 있다는 데 정말 고래잡이라도 나갈건지 어마어마하게 큰 그물을 온 동네 남자들이 모여서 작업을 한다. 어디로 싣고 갈려는 건지, 엉킴이라도 푸는 건지 모르겠다. 잠깐 서서 구경하다가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길래 다시 발길을 재촉, 슈퍼에 들러 오늘 저녁과 내일 오전에 마실 맥주 두캔(이제는 저장까지 할 태세다)과 소세지 안주를 사서 도쿠마스에 닿는다. 3시도 전이다. 일단 배낭을 풀고 근처 바닷가를 돌아본다. 

55번 국도에 면한 민슈쿠 도쿠마스에서 길만 건너면 바로 바다다. 이렇게 가까이 자리해도 태풍이나 쓰나미에 괜찮을 지 불안한 위치다. 그 걱정만 아니면 며칠이라도 몇달이라도 숙소의 2층 방에서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았어도 좋겠다.

2층 테라스가 딸린 방에서 창밖으로 사람이 다니길래 내다보니 오전의 그 젊은 커플이다. 눈인사만 했다가 저녁 식사때 다시 모인다. 그 외에도 세명의 남자 오헨로상이 더 묵어서 나까지 총 6명이 저녁을 먹는다. 젊은 남녀 커플은 남자가 방송 스탭, 여자는 조연배우란다. TV에서 본 기억은 전혀 없다. 헨로미치를 다 돌거는 아니고, 휴가차 왔다가 이틀 후면 도쿄로 돌아간단다. 나머지 남자 셋 중 한 명은 두번째 순례중이라 하고, 또 한 명은 4번째 순례중이라며 순례여행기를 올리고 있는 블로그 주소를 알려준다. 나중에 슌스케 핫토리상의 개인 홈페이지(http://home1.catvmics.ne.jp/~hattoris/)에 들어가보니 시코쿠 외에 일본 다른 지방의 여행 기록도 세세하다. 무려 20년째 걷고 있다니 참 대단하다. 시코쿠 외의 다른 곳을 걷고 싶을 때 참조해도 좋겠다.

나머지 한명은 말이 없는 데 그 중 젊은 편이다. 

내가 일본 사람같이 생겼는 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 놀란다. 일본인의 기준으로 봤을 때 여자 혼자서, 외국을, 그것도 아루키헨로(걸어서 1200킬로)를 하고 있는 게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가 보다.


진화하는 밥상!


민슈쿠 도쿠마스의 저녁도 나름 괜찮다. 정말 어촌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은 밥상이다. 

바다에서 낚아 올린 신선한 재료로 한 상 가득 차려 낸 , 투박하지만 정감있는 밥상은 양도 푸짐하다.
주인장한테 슈퍼에서 사온 맥주를 마셔도 되는지 양해를 구하고 한 캔을 비우고, 나머지 한 캔은 식사 후에 냉동실에 넣어 얼려달라고 부탁한다. 얼리면 터지지 않겠냐고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길래 많이 해봤는 데 안터지더라고 안심시킨다. 

내일도 오전내내 바닷길이고 편의점도 없을테고 얼은 게 녹을 즘엔 목이 마를테니 점심으로 마셔보련다. 

어쩌다가 점심은 맥주 한캔으로 굳어져간다. 그래도 몸에 좋은 것만 먹으니 탈나진 않을 거라고 변명거리를 찾고 있다.



도쿠마스민슈쿠(2식 포함) 7000엔

점심,음료 760엔


총 7760엔

이동거리 3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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