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진부하지만 이렇게 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이번 여름 스위스에 사는 조카 마리아의 결혼식은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기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각인됐다.
스위스 시민으로 살고 있는 손위 시누이의 둘째 딸 마리아는 얼굴은 한국 아이지만 한국말의 뉘앙스에 서툰 외국인이다. 서울에 오면 우리 집에 머물곤 하는 형님네 세 자매를 보며 나는 결혼 초기 내 딸을 스위스에서 교육시키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만큼 스위스에서 태어나 자란 시누네 세 자매는 순수하면서도 자유롭고, 자아가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건강한 아이들이다.
세 아이 모두 엄마 아빠의 나라인 한국을 좋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곤 한다. 둘째 마리아는 이화여대 교환학생 과정을 이수했고 서울에 오면 홍대 클럽에서 밤새 놀기를 좋아하는 천상 요즘 아이다.
마리아의 결혼식 초청장을 받자마자 우리 가족은 바로 스위스 여행 계획을 세웠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술적 안목을 가진 마리아가 과연 어떤 신랑을 골랐을까 궁금해하며.. 바르셀로나를 거쳐 스위스로 가는 여행 일정에 직장인 딸은 스위스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솔직히 마리아의 결혼식에 큰 기대를 건건 아니다. 결혼식은 그냥 결혼식이니까... 다만 결혼식을 빌미(?)로 코로나 이후 모처럼 길게 가는 휴가 여행이 주목적이었으며 중간에 있는 마리아의 결혼식은 우리가 ‘서울 대표팀’으로 참석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달고 있었다.
게다가 마리아는 작년 겨울 독일인 신랑 파울과 가족 결혼식, 혼인서약을 마친 후 부모품을 떠나 이미 쾰른에서 실질적인 부부로 살고 있다(지난번이 약식, 이번이 진짜로 결혼식을 두 번 하는 셈).
성스럽고 따뜻한 분위기의 그슈타이크 교회는 결혼식장으로서의 최고의 장소였다(출처: Gsteig 교회 홈페이지)
바르셀로나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우디 심층(?) 투어로 한껏 상기된 남편과 나는 결혼식과 서울 대표팀 의미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스위스로 향했다.
베른의 시누댁에 짐을 풀고 다음날부터 우리 가족은 기차를 타고 로잔, 몽트뢰 등 베른 근교 도시로, 알프스 수스텐파스(Sustenpass. 스위스 3대 패스 중 하나로 바이커들의 로망의 로드, 이 언덕을 넘으면 이탈리아다)로, 루체른, 이젤발트(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유명), 툰 호수로, 심지어 오본느 아울렛까지 신나게 쏘다녔다. 베른을 가로지르는 아래(Aare) 강가에서 베른 사람들처럼 태닝과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이번에 스위스 여행에서 건진 보물 중 하나는 베른 옆동네의 나지막한 벨프(Belp) 산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풍광이 그지없는 곳이다. 베른 시내가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이는 정상(차를 타고 올라간다)의 노을 지는 풍경을 보며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 사이를 맨발로 걷기도 했다.
시누네 덕분에 관광지가 아닌 스위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숨겨진 장소들을 보며 탄성을 지르고 밤에는 라클렛(퐁듀와 함께 스위스를 대표하는 치즈요리)과 와인으로 여행을 즐기는 가운데 마리아의 결혼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돌리는 곳곳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던 그슈타이크 마을
스위스 신부와 독일인 신랑의 지인들이 곳곳에서 속속 도착한다
인터라켄의 조용한 산 아래 마을, 중세부터 있었다는 작은 그슈타이크(Gsteig) 교회에서 치러진 이 소박한 결혼식은 가족과 친구들의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 찬 시간 공간을 연출했다. 마을에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 들꽃이 흐드러진 뒤뜰, 교회 옆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 만으로도 이미 결혼식 시작 전 마음이 말캉말캉해진다.
신부의 자매인 요한나(언니)와 한나(동생), 마리아의 친구들이 결혼식장 장식과 만찬 준비를 맡았다. 싱그러운 여자아이들이 드레스 자락을 팔랑거리며 식장의 의자에 꽃장식을 하다 유일한 서울 손님인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결혼식장 장식과 만찬, 웨딩송 등 진행과 준비를 맡았다.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은 모두가 신랑 혹은 신부를 잘 아는 지인들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은 모두가 신랑 혹은 신부를 잘 아는 지인들이다. 우리를 빼고는 독일과 스위스 여러 동네에서 도착하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 신부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면 다른 누군가가 바통을 이어받는, 모두가 자연스러운 웨딩 잔치의 분위기.
교회 친구였다가 연인이 된 이 커플을 오랫동안 보아온 젊은 독일인 목사님이 주례를, 사회와 웨딩송, 결혼식 예배의 찬송가 연주는 신랑의 절친들이 담당했다.
친구였던 마리아와 파울이 부부가 됐다. 왼쪽이 사회, 오른쪽이 주례
성스럽지만 따뜻한 유머가 곁들인 젊은 목사님의 주례사는 교회 친구였다가 부부가 된 이 커플을 오래 지켜봐 온 분 답게 세심하면서도 진지하다.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은 대체로 신부, 신랑, 혹은 이 둘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거나 함께 해온 가까운 지인들이다
이어 디너파티를 위한 2부 피로연으로 이어진다. 장소는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속에 위치한 나무로 지어진 예쁜 산장 트링크할레(Trinkhalle)다. 활짝 열어놓은 넓은 통창에 융프라우(Jungfrau, 베른 알프스 산맥에 속하는 산)가 그림처럼 걸리는 보기 드문 뷰는 아무 장식 없이도 완벽 그 자체다.
디너파티가 진행된 산장은 인터라켄의 트링크할레(왼쪽 사진 출처는 Trinkhalle 웹사이트)
핑거푸드를 곁들인 웰컴 드링크를 즐기는 동안 일행이 하나 둘 도착하면서 피로연이 시작된다.
신랑 신부의 양측 부모, 자매, 친구들이 돌아가며 신랑 신부와의 추억,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파티의 분위기가 고조된다. 독일어와 스위스어로 진행돼 우리 가족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때로 미소 짓고 때로 울먹이는 진심 어린 표정에서 이들이 얼마나 신랑 신부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친구들이 준비한 아카펠라 축가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산속에 울려 퍼지는 무공해의 하모니는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다.
디너와 함께 하객들은 신랑신부의 친구 가족들이 마련한 프로그램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융프라우 배경은 시간이 흐르며 컬러가 바뀐다. 한여름에도 눈에 덮여 낮에는 푸른 하늘과 대비돼 하얀색인 이 봉우리는 시간이 흐르며 노을에 물들어 점차 믿을 수 없는 핑크색으로 변하다가 밤이 되며(스위스의 여름은 10시가 돼야 태양이 사라진다) 달빛을 받으면 파란색으로 바뀌어간다.
비현실적인 컬러의 향연이다.
시간에 따라 융프라우의 컬러변화를 지켜볼 수 있다
와인과 분위기에 취해 디너가 끝나면서 어른들은 철수하고 신랑신부와 친구들은 산장에 남아 3부로 넘어간다. 춤추고 노래하며 밤새 즐기는 젊은이들의 시간이다. 낮 3시부터 밤새 이어지는 올데이 웨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