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꿈
낭떠러지를 발아래 둔 아슬아슬한 좁은 길을 걷고 있다. 알 수 없는 어둠.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가까스로 돌아본 뒤는 걸어왔던 길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이다. 끔찍한 장소에 혼자 서있다. 심장이 빨라지고 거친 숨이 목을 당기며 올라온다. 배 속이 뒤틀리고 울컥,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얼굴을 붙잡는다. 화끈거리고 비릿한 냄새가 난다. 발을 잘못 디뎌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내 몸을 자꾸 상상하고 있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기게 자란 축축한 야생식물의 기다란 잎자루를 움켜 잡고 떨어지면 안 된다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소리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가 부들거릴 뿐이다. 악몽을 꾸는 중인가, 알아챈 나는 겁을 삼키고 주저앉아 지체하는 위기의 나를 잠 밖으로 밀어냈다. 일어나!
물 한 컵을 들이켠다. 새벽 2시 20분. 창문 열어놓고 잤구나, 어쩐지 목이 칼칼하더라. 창문을 닫으려는 그 순간, 와아! 황금빛을 내뿜는 달이 검푸른 새벽하늘에 새초롬하게 떠 있다. 독보적이다! 작고 동그란 것이 정말 반짝거린다.
“꿈꿨구나?”
괜히 울컥한다.
힘들 때, 혼자인 것 같을 때, 밤과 나는 가까운 사이다. 이상한 꿈을 꾼 뒤 깨어나는 새벽 시간은 더욱 그렇다. 이상하다. 저리도 밝은 달은 서울에서 좀처럼 보기 쉽지 않은데. 달을 바라본다. 고독의 좌표를 스스로 찍는 자리에 가까이 나타났다가, 숨어있기도 하며, 부유하다가 멀리 떠나기도 한다. 하늘 어디에 늘 있는 거다. 달과 삶이 닮아있구나 중얼거린다.
달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제 모양을 바꿔가며 동네를 비춘다. 닫힌 곡선으로 그릴 수 있는 단순한 도형으로 둥글 때도 있고 뾰족하게 모가 날 때도 있다. 지금, 자연과 인공의 소리가 친밀한 언덕 아래, 구리색 건물 5층 높이 방에 앉아 있는 지금 서울의 새벽 달빛을 바라보고 있음이 감사하다. 밝은 달이 오고 싶은 날만 골라 나오기에 놓칠 수 없는 황홀한 순간이다. 고요한 밤거리를 지나는 새벽의 취한 농담, 귀뚜라미, 강아지 짖는 소리, 뜸하게 지나는 자동차 소음마저 친근한. 도시의 가을이지만 나무와 풀 냄새가 제법 많이 나는 이 동네가 좋다. 무서운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이 살기에 적절한 동네다.
달을 보니 엄마가 떠오른다. 잠꼬대를 하며 주무시고 계실 거야.
“아침은 챙겨 먹고 나간 거야?”
“넌 잘 안 먹어서 그게 탈이야.”
“그렇게 새 모이처럼 밥을 먹다가는 큰일 난다니까.”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어려서부터 입이 짧았던 나는 놀라울 만큼 식탐이 없었다. 엄마가 습관처럼 던지신 문장들은 어린아이의 식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고, 밥을 자주 거부하는 청개구리 어린이가 되었다. 스스로 챙겨 먹는 일은 당연히 드물었고, 배고파도 별로 밥 생각이 없다고 느꼈다. 조금씩 군것질하듯 밥을 먹었다. 이상한 아이는 덕분에 잔병치레와 병원을 드나드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내가 식탐이 많고 음식을 가리지 않는 잘 먹고 덩치 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덕분인지 키도 크고 대체로 먹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몇 있다. 사람은 뱃속이 허하면 안 된다는 엄마의 당부를 기억하며 잘 챙겨 먹도록 하자.
어딘가 바깥에서 구멍 안을 들여다보는 빛나는 눈동자가 달이라면, 미련한 삶을 사는 나는 안쪽에 웅크린 사소한 꿈틀거림이다. 엄마의 음순 구멍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 나. 엄마는 나를 밀어냈고 나는 물컹거리는, 힘없이 작은 미숙아로 태어났겠지. 몸은 위아래로 안팎에 살아 움직이는 미미한 꿈틀거리는 것들이 자유롭게 들고 나는,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장소다. 애처롭게 길쭉한 나의 몸이 오늘도 부유한다. 꿈속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 보잘것없는 삶을 응시하는 달이 차마 닿을 수 없는 우주의 먼 곳에 있다 하더라도, 달은 나에게 밥 잘 먹고 덩치 큰 선한 친구다. 거기 있는.